
Tristitia
율
@SeRenDipiTy_Vv
기억은 잊혀 지기도 하며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원히 망각의 길을 걷지 않는 기억들도 있다.
이제는 손에서 놓고 싶은데
내 손을 붙잡고 날 놓아주지 않는
그런 기억...
Tristitia (트리스티티아)
: 슬픔, 절망
*작가의 스타일로 변형된 초능력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들 말한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 갖지 말라고.
나도 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단 걸.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단 걸.
하지만 그래서 더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운명이었기에 바꿀 수 없었고
운명이었기에 난 계속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
소중한 내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우린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이렇게 태어났어야만 했을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그 지독히도 갑갑한 그 말이 이제는 너무나도 싫다.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게 내 운명이었다면
내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네 운명이었을까.
“형 또 그 생각이에요?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이것 좀 잘라줘요. 한상혁 이시키가 걸핏하면 칼을 다 녹여놔서 부엌에 칼이 남아나질 않아, 정말. 쟤는 무슨 철이랑 쇠랑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대? 왤케 다 녹여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다시 부엌으로 향하는 홍빈을 뒤따라가 보니 도마 위 수북하게 쌓여있는 야채들이 날 반겼다.
“아 택운이형 왔어요? 아무래도 홍빈이형이 우리를 토끼로 키우려나 봐요. 며칠째 고기반찬을 못 보고 있어.”
“누가 냄비랑 프라이팬을 다 녹여버렸더라~?”
하루가 멀다 하고 또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홍빈과 상혁을 내버려두고 도마 위에 놓여있던 야채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이 닿자마자 맥없이 조각조각 나버리는 야채들에 힘없는 실소만 터져 나온다.
“엇.. 너무 잘게 자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야채들을 움켜잡고 있었나 보다.
잘게 조각 나버린 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숟가락으로 퍼먹지, 뭐.”
“근데 숟가락은 있나, 집에?”
가끔은 나도 저 둘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고 싶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그렇게라도 살면 이 모든 일들이 없었던 게 될까.
그 애와도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
우리 모두는 그 일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잊고 살고 있다.
산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까.
어쩌면 그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그 불행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것일지도.
학연이형은 마지막까지도 그 형다웠다.
자신이 지금 누구 때문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살릴 수 있다는 내 말에도 형은 자신은 여기서 죽는 게 맞다며 여기서 미래를 바꾸면 그 물줄기는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어져서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른다는 말과 남은 멤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떠났다.
나를 저주했다.
그리고 형의 능력을 저주했다.
형이 미래를 보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형이 미래를 보았더라도 이 상황이 또 왔더라도
내가 리커버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형에 대한 죄책감은 줄어들었을까.
내가 그 때 형의 말을 다 무시하고 형을 살렸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 상황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
나라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나도 택운이형이 미치도록 미웠던 때가 있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형이 밉다.
하지만 학연이형이 그렇게 죽어야 했던 것도 내가 치유의 능력이 있음에도 그 비극을 막지 못한 것도 택운이형이 커터인 것도 다 우리 잘못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었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죽어야 했을 뿐이었다.
그 날, 그리고 그 때 형이 내게 제발 다른 애들을 이끌고 보듬고 잘 살아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당부가 없었다면 난 내 삶을 그 장소에서 끝냈을지도 모른다.
형을 따라서.
그리고 당부와 함께 전해진 형이 본 미래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데에 대한 한 몫을 했었다.
형이 없는 우리 다섯의 미래는 다섯 조각이었다.
우린 다 흩어졌다.
그래, 차라리 뿔뿔이 흩어지는 게 서로의 생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철없는 생각은 안 했던 건 아니다.
정말 생사에만 초점을 둔다면 우린 같이 있으면 안 된다.
온 몸이 보이지 않는 칼날로 이루어져서 스치기만 해도 피를 보게 되는 커터인 택운이형, 철과 쇠를 녹이는 능력, 즉, 온 몸이 칼날인 택운이형을 한방에 보낼 수도 있는 메탈 파이어네트로 상혁이.
이 둘은 사실상 가장 붙어있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다.
나와 재환이형, 원식이가 이 둘과 같이 있는다 해도 도움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상혁이가 대상을 녹이는 속도가 더 빠른데다가 내 치유의 능력의 대상 범위는 ‘나를 제외한 생명체’에 한 한다.
철과 쇠로 이루어진 커터는 내 능력에게는 생명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인빈시블인 재환이형은 그 둘은 물론 나와 원식이에게도 딱히 어떠한 도움을 주진 못한다.
인빈시블. 죽지 않는 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형이 살아남아 있어준다는 그 사실만으로는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본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효력도 미치지 못하는 능력이다.
어쩌면 우리 셋 중에 그나마 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원식이일지도 모른다.
기억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
만약에 정말 만약에 택운이형과 상혁이 둘 중 하나만 남게 된다면 원식이가 그 남은 사람의 기억에 손을 대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소용이 있을까.
기억을 조작한다고 현재 또한 바뀌는 건 아니다.
어쨌든 형은 죽었고 우린 다섯이다.
몇 차례 충동은 들었었다.
차라리 내 기억이 사라진다면 덜 괴롭진 않을까 하면서.
그럴 때마다 그 날 형을 살리지 못했던 내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내 선택에 대한 짐.
난 그걸 평생 져야만 한다.
그게 형의 부탁에 대한 내 답이니까.
“저 형 또 저러고 있는데...”
옆에서 팔꿈치를 툭툭 치는 것에 고개를 드니 상혁이가 거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바닥에 멍하니 앉은 채로(원래는 거실에 소파가 있었는데 형이 다 해먹는 바람에 치웠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택운이형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저 형 저렇게 바닥에 오래 앉아있으면 바닥에 기스 장난 아닐 텐데... 형이 좀 가서 일으켜 와 봐요.”
“넌 싱크대에서 손부터 떼. 싱크대까지 녹이면 정말 이 집에서 쫓아낼 줄 알아.”
“싱크대가 금속일지 아닐지 궁금하지 않아요, 형?”
“안 궁금하니까 제발 손 좀 떼.”
불안함을 뒤로 한 채 거실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인영에 한두 발자국 거리를 두고 섰다.
“형 또 그 생각이에요?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이것 좀 잘라줘요. 한상혁 이시키가 걸핏하면 칼을 다 녹여놔서 부엌에 칼이 남아나질 않아, 정말. 쟤는 무슨 철이랑 쇠랑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대? 왤케 다 녹여대.”
진심 가득한 웃음이, 미소가 결여된 웃음 섞인 장난이 차가운 집 안의 허공 속으로 흩어진다.
*
“죽이고 싶어.”
“그러지 못한다는 거 알잖아, 형.”
“죽고 싶어.”
“그러지 못한다는 거 알ㅈ..”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재환의 말에 홍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이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평생을 자신의 능력 바깥의 일은 할 수도 없으며 시도조차 해볼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능력의 틀 안에서 마주해 오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린 시절 재환은 또래 애들에게 인형이었다.
아무리 괴롭히고 가지고 놀아도 절대 망가지지 않는 인형.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숨이 멎고도 남았을 그 상황에서 재환은 그저 잠이 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뜰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상처들은 사라져 있었다.
아주 멀쩡하게.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괴롭히는 또래 아이들도 없고 자신을 온갖 실험의 실험체로 썼던 연구원들에게서도 벗어났지만 재환은 여전히 악몽과 원인모를 고통에 시달렸다.
차라리 잠이 드는 것처럼 눈을 감고 그대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이것이 과거형이 되게 해준 데에는 학연의 공이 컸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재환은 비로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죽을 일이 없는데도.
그런 학연이 택운에 의해 죽었다.
자신에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준 인물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죽이고 싶었다.
그를 죽인 그를.
아니, 어쩌면 자신도 그를 따라 죽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러나 애석하게도 둘은 서로를 죽일 수 없었다.
헤칠 수야 있겠지만.
“이게 정말 형의 뜻이야? 이렇게 서로 낯짝 보면서 사는 거? 그 새끼 얼굴을 매일 마주하면서 마주할 때마다 피범벅이었던 형 떠올리면서 사는 거?”
“흩어지지 말라고 했어. 흩어지면 불행이 찾아올 거라고.”
“그럼 지금 이렇게 사는 건 불행이 아니고 뭔데.”
이번에도 홍빈은 대답하지 못한다.
딱히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이 재환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노을이 지는 하늘의 붉은 빛이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다.
노을이 구겨진다.
그래, 그는 그 날 이후로 붉은 색은 지독히도 싫어했다.
“한상혁은.”
“어..?”
그대로 끝난 것 같았던 대화가 문득 다시 이어진다.
구겨졌던 노을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푸른 공허함이 굴곡진 얼굴 위로 가득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 붉게 빛났냐는 듯이.
“유일하게 정택운 보내버릴 수 있는 애잖아, 한상혁.”
“그건 그렇지.”
“근데 왜 가만히 있냐고. 손 하나 까딱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으면서 그 한심한 새끼는 왜 가만히 있는 거냐고.”
“어쩌면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게 벌이라고 생각했나 보지, 상혁이는.”
“나처럼?”
“...”
“씨발. 벌 한 번 지독히도 기네. 그 새끼는 사람 죽여서 벌을 받는다 치자, 그러면 대체 나는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뭐, 태어난 자체가 잘못인 건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들을 뱉어내던 재환이 뒤 쪽에서 들리는 문소리에 언제 열었냐는 듯이 입을 꾹 하고 다물었다.
굳게 닫힌 입술만큼이나 단호하게 가로로 그어진 눈썹이 문 밖 상대와 저와의 사이에 두터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홍빈아, 상혁이가 너 찾아.”
저를 방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그 공기에 택운의 말이 주춤거리며 그 앞에 수놓아졌다.
수놓아진 말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재환에 의해 흐트러졌고 무거운 공기는 그대로 택운을 눌러버렸다.
“예전으로.... 예전처럼... 그렇게.. 다시 지낼 순 없겠지...?”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말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희미해진다.
“어렵겠죠. 아마도.”
“...그래.”
“저 상혁이한테 가볼게요. 마음 좀 추스르고 나와요, 형.”
*
매일 밤, 그 날이 되풀이됐다.
너와 장을 보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너는 온데간데없고 조금 전까지 네가 있던 자리에는 피 웅덩이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연...아..?”
마치 내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붉은 그것은 점차 제 영역을 넓혀가다 나를 덮쳤고 그때마다 난 소리를 지르며 깨곤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항상 보는 장면은 그 붉은 것들 사이에 묻혀 있는 네 두 눈동자였다.
늘 이런 식이었다.
내 앞에는 핏자국들이 낭자한 광경이 펼쳐져있고
난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건지
왜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그때마다 어렴풋이 깨닫곤 했다.
아 나구나.
내가 그랬구나.
어쩌면 재환이가 했던 말이 맞는지도.
난,
모든 불행의 씨앗인 거다.
내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면
내 불행의 씨앗은 과연 무엇일까.
날 이 불행으로 이끈 가장 최초의 불행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는 척 아니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다 잊을 수 있어? 사람을 죽여 놓고!! 아무것도 기억 못한다면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냐고!! 기억해!! 기억해내 당장!!!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왜 그랬던 건지 기억해내라고!!!”
“형 일단 진정해. 형이 그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잖아. 일단 진정하고 들어가서 나랑 얘기해.”
홍빈이가 재환이를 데리고 들어간 방에서는 뭉툭하지만 예리하게 파고드는 말들이 나를 향해 바늘같이 꽂혀왔다.
“너도 잘 생각해. 언젠간 그 날의 학연이형처럼 저 자식의 망각 속에서 너나 내가 죽어갈 수도 있다고.”
“하지만...”
“학연이형이 한 말 때문에 이렇게 계속 같이 살아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다섯 명이 다 흩어지게 될 거라고? 야 이홍빈. 정신 차려. 이대로 같이 살면 아무도 안 죽고 뭉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우리는 애초부터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야. 애초부터 같이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지금껏 잘해왔잖아. 몇 년 간 같이 살았지만 아무 문제없었어. 그 날은 그냥 사고였을 뿐이야.”
“이제 학연이형 없잖아. 그 형 없으면 우린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어. 이제껏 잘 살아왔다고? 다 그 형이 앞으로 닥칠 일들을 미리 알려준 덕분이잖아. 잠결에 한상혁이 정택운 녹여죽일 뻔한 것도 형이 막아서 일어나지 않았던 거고. 아 차라리 그때 정택운이 죽었어야 했는데.”
*
“아 차라리 그때 정택운이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게.
그날 학연이형 컵에 약을 더 탔어야 했는데.
괜히 애매하게 빨리 깨버려서 일을 다 망쳤잖아.
다 미리 봤으면서 속아주는 거면 제대로 좀 속아주던가.
속아주다가 마는 건 또 뭐야?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속아주다가 말아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자기가 죽었잖아.
바보도 아니고...
미리 봤으니까 왜 피하질 못 해.
피하라고 미리 보는 거 아니냐고.
미래를 왜 보겠어.
미리 보고 바꾸라고 보는 거지.
제 능력 하나 제대로 활용 못하고 그 능력 때문에 죽기나 하고...
내 의지 하나 없이 무작위로 부여된 능력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내게 주어진 능력이라면 내 의지로 원하는 곳에 올바르게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나도 지금은 애먼 숟가락들이나 녹이고 있지만 언젠가 내 능력을 올바른 곳에 쓸 것이다.
올바른 곳에.
신이 내게 이 능력을 줬다면
어딘가 쓸 일이 있는 거겠지.
“너는 정말 학연이형이 본 미래가 전부라고 생각해?”
다시금 방에서 재환이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본 미래. 우리가 같이 살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서로 아예 모르는 사이처럼 흩어지게 된다는 그 미래. 그게 전부라고 생각 하냐고.”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때 형이 본 미래가 우리가 흩어지게 되는 수많은 경로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면?”
“그게 무슨...”
“어쩌면 우리는 뭘 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언젠가 다 흩어질 운명이었다면? 어차피 다 흩어질 운명이었고 그 운명으로 가기 위한 무수히 많은 선택지들 중 하나를 학연이형이 본 거라면.”
“그럴 리 없어. 형이 본 미래의 반대로만 우리가 행동하ㅁ...”
“반대로 행동한다고 미래도 반대로 흐르는 거 아냐. 하나의 물줄기를 막으면 그 물줄기가 두 개, 세 개로 나뉘어서 흐른다고? 아무리 물줄기가 나뉘어도 모든 물줄기들은 바다를 향해 흘러. 바다로 가는 물줄기를 막는 방법은 단 하나. 물 자체를 없애는 거야. 물줄기 자체를 없애는 거라고.”
“그 말은... .....형...!!!”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슨 일 ㅇ...”
둘이 있던 방에는 둘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둘은 더 이상 다투지 않는다.
“택운이형...”
*
꿈을 꿨다.
같은 꿈이었다.
학연이와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늘 그랬듯이 어느 순간 학연이는 사라지고 피웅덩이 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웅덩이 속에선 나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가 있었다.
그 두 눈동자...
학연이가 아니다.
“...이홍빈.....”
혼자가 아니었다.
“택운이형...”
꿈이 아니다.
*
“야 이 멍청아!!! 왜... 왜...!!! 왜 네가 날 보호한다고 내 앞을 막아 서, 왜!!!"
재환의 절규가 방을 울렸다.
선명한 핏빛에 빛을 빼앗겨버린 두 눈동자가 간신히 그를 향한다.
어쩌면 난... 타인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난... 타인을 위하는 척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쳐 버린 것일지도.
주인을 잃은 손가락 끝이 주먹을 불끈 쥐는 상혁을 지나쳐 문가를 향했다.
마찬가지로 방 안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원식이지만 마치 그 풍경과는 별개인 것 마냥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냉소를 머금고 있다.
당신은 분명히 그럴 거야.
당신은 분명히 언젠가 이렇게 우리를 다 망가뜨리고 평화를 깨버릴 거야.
내 동생을 내게서 빼앗았듯이 당신은 모든 걸 다 앗아가 버릴 거야.
난 그걸 예방하는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당신은 그저 내가 보여주는 것들은 그대로 보기만 하면 돼.
그리고 떠나
이곳을
어느새 냉소가 사라지고 굳은 입꼬리만이 자리 잡은 얼굴에 점차 빛이 비추인다.
빛을 받은 눈동자에는 다섯 명이 한 데 어울려 있는 풍경이 비친다.
“아니 형! 공을 받으라니까 왜 터뜨리고 있어~!”
“그니까 왜 택운이형한테 패쓰를 해요 ㅋㅋㅋ”
“얘들아 진정해. 그럴 줄 알고 농구공 10개 더 사놨어.”
“흐익... 10개 살 돈은 어디서 났어요?”
“홍빈이 저금통 좀 뜯었어.”
“아 형!!!”
터진 채로 잔디밭에 나뒹구는 농구공 조각들과 터진 채로 흩어지는 웃음들.
그 속에서 원식은 별개인 것처럼 그렇게 팔짱을 끼고 있다.
내가 막을 거야.
다시는 그렇게 허무하게 내 사람들을 잃지 않겠어.
내 동생을 데려갔어도 더 이상 내 사람들을 데려가진 못 해.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는 원식 뒤로 농구 골대 옆 휴대폰 액정이 생기를 띄었다.
‘내 동생’
기억은 잊혀 지기도 하며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원히 망각의 길을 걷지 않는 기억들도 있다.
이제는 손에서 놓고 싶은데
내 손을 붙잡고 날 놓아주지 않는
그런 기억...
Tristitia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