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구역 ; section 6
Perple
@Perple_Ravixx
"자, 그럼-"
눈을 뜨세요.
*
"....아니야, 내가 아니야!!"
"네가 아니라고?"
능글맞게 웃던 남자의 입가에서 광기로 번들거리던 웃음이 지워졌다.
흠, 글쎄.
모든 게 너였는걸.
.....처음부터 말이야.
*
"어이, 한상혁! 들어가."
익숙하다.
나를 벌레처럼 내려다보는 형사의 눈빛, 또 힘든 싸움이 될거라 예상하는 듯한 표정.
경찰서를 여러번 전전했음에도 여전히 그 표정들만은 참을 수 없다.
취조 심문마다 질질 끌고 원하는 대답을 도출해주지 않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형사들을 하나씩, 하나씩, 피말려 죽이는 것보다 흥미로운 건 없다.
긴 탁자 하나 의자 두 개, 밝은 LED조명이 빈 공간을 채운다.
분명히 저쪽에 있는 검은 유리벽면으론 날 감시하고 있겠지.
톡톡톡.
초조해보이는, 약간은 젊은 남자가 손끝을 연신 떨고 있었다.
"자, 한상혁씨..."
"역겨워."
".....네?"
"....."
형사라는 작자가 무슨 말을 하든 알게 뭐람.
상혁은 유리너머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올려보이고는 제 앞의 형사를 노려보았다.
너 따위도 결국은 질려하면서 나갈 텐데 뭐. 그래, 얼마나 오래 버티나 보자.
"상혁씬 참 표현이 과격하네요."
".....왜, 마음에 안 드나? 그럼 꺼지시던가."
"으음, 아니요. 그냥.....뭐랄까. 당당하게 자기 기분 표현하는 거,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전."
뭐야 이 또라이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데. 신입인가?
형사를 꼴아보던 상혁이 계속 굳어있던 어깨와 목을 가볍게 풀었다.
여기서도 그냥 빙글빙글 웃으면서 끌다가 다시 유치장에 들어가면 그만, 귀찮고 긴 싸움이지만 그 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자신인 그런 결투.
고작 이곳에 보낸 일대일 형사 취조에서 알아낼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혁씨, 여기서 상혁씨가 자백만 하면 형량도 줄어든다는거, 알잖아요. 20XX년 XX월 XX일. 대곡동 산업단지에서 스무살 여성 죽인 거, 상혁씨 맞죠? 왜 죽였어요?"
"...죽였다니, 누굴? 내가?"
"....."
"난 누굴 함부로 죽이지 않아. 그게 누구든. 근데 왠지....지금은 그러고 싶은걸."
".....!"
오히려 놀란 것은 형사 쪽이었다. 이미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파들파들 떠는 모습이 꼭 궁지에 몰린 쥐 같았다. 그것도, 동물실험 연구원들이 제멋대로 바늘을 찔러넣는 흰쥐.
"....그렇군요."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수긍하던 형사가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 이상한 질문, 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무슨 느낌인가요? 그리고 그 전과 후의 기분은요?"
꼴에 진지하게 묻는게 같잖아 상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도 수사에 포함되는 건가? 이런 시답잖은 질문?"
"아.....그럼, 마이크도 끄고, 문도...잠글게요. 수사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얘기하는 걸로 치죠."
밖과 완벽히 차단된 방의 의자에 다시 앉은 형사가 물었다.
"나는, 상혁씨를 더 알고 싶어요. 그러려면 상혁씨가 우릴 도와야 하는데, 그래줄 수 있어요?"
".... .."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전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대답해도 되고요. 분명히 상혁씨도 여기서 나가 아름다운 세상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텐데, 계속 이렇게 진술거부하면 저흰 도울 수가 없어요."
"세상이....아름답다고."
"그래요.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도 많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도 나쁘진 않잖아요. 매일 뜨는 태양이라도 눈부시고..."
"어떻게 그래?"
네? 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아니, 틀렸어. 이 세상이란 건 지독하게 더럽고 환멸나는 하수구일 뿐이야. 햇살? 그런 게 뭐 의미가 있다고. 햇살이 의미 있는 거였으면 내가 이렇게 썩지는 않았어!"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떽떽거리며 내뱉는 말에도 형사는 사람좋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역시 그였다.
뭐야, 신입이라고 나에 대해 듣지 못한것도 아닐텐데.
순간 흥미가 생겼다. 이건 뭐지, 싶기도 한 느낌,
자신과는 다르다는 이질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제가 사는 곳에선 그렇지 않아요."
하, 얼마나 다르면 그러겠어.
"뭐, 지구 반대편에 살기라도 하나? 어쨌든 같은 땅덩어리에서 사는건 같을텐데."
"보여드릴까요? 제가 사는 세상이 어떤지, 이곳과는 얼마나 다른지."
"....보여줄 수나 있고?"
"그럼요. 지금 당장도 보여줄 수 있는걸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인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대고 이상한 손짓을 했다.
마치 누군가를 불러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
마치 얇은 막으로 싸여진 물방울처럼, 둥글고 투명한 것을 손바닥에서 키워낸 형사가 그것을 점점 크게 만들어내 공중에 띄웠다.
투명한 줄 알았던 막 너머로 보이는 밝고 노란 햇살, 푸르른 초원, 내리쬐는 태양 아래 띄엄띄엄 자리한 가정집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아니, 모두 사람처럼 행동히고 있지만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은 없다.
전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들어가 볼래요?"
묻는 형사에게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 있던 형사는 없고 웬 푸른 깃털의 청학 한마리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어 상혁은 내심 당황했다.
학이 말을 하다니. 이건 꿈인가?
하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그것에 다시 놀랄 뿐이었다.
".....그래."
과연 네 세상이란 게 무엇인지.
내가 그걸 짓밟으면 어떻게 될지.
그는 그곳에 들어서지 않았어야 했다.
*
"여긴....."
"아까 말했죠? 제가 사는 세상이라고요. 여기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죠."
물방울을 통해 그의 세상으로 지나온 형사, 아니, 청학이 약간은 자랑스럽다는 듯 상혁에게 말했다. 어째서 학과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것인지, 또 왜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서도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아 상혁은 그대로 놔두었다.
"그럼, 넌 여기서 뭘 하는데?"
"전....이곳에서 무엇이든 하죠. 밥을 먹던, 무언가에 대해 고찰하던, 가끔은 멍을 때리기도 하고요."
"......"
아, 해가 지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청학이 상혁을 돌아다보았다.
"흠, 곧 해가 뜨니 일출이나 보러 갈까요?"
"방금 해가 진 거 아니었나?"
"여긴 하루에도 해가 몇 번씩 뜨고 져요. 사실 시간이란 게 별로 필요가 없죠. 자, 그러니, 가요."
등 떠미는 손길에 상혁은 저도 모르게 청학을 따라 걸었다.
밤과 같이, 어두운 거리에 드문드문 켜져 있는 조명에 달린 눈동자가 상혁의 발걸음을 따라 좇았다.
그러나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학이 산다는 세상은 어디 하나 정상적인 부분이 없었다.
하루에도 두세번씩 뜨고 지는 태양과 달, 바닥에 뜨는 구름, 걸어다니는 물고기, 사람처럼 보이지만 귀와 꼬리가 달린 반인반수...
죄다 괴상했지만 그곳에서 둘은 당연한 듯 걸어갔다.
"얼른요. 금방 해가 뜨겠어요. 이곳에서의 일출은 무척 특별하답니다."
"왜, 하루에도 몇 번씩 뜬다며. 뭐가 그렇게 특별...."
보라색의 짙은 안개가 바다 저편에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것은 금세 주황색으로, 주황색은 초록색으로 바뀌어 점차 둥글게 모여들었다. 계속해서 모여드는가 싶더니, 곧 그것은 뭉쳐져 밝게 빛나는 해가 되었다.
"오늘이 새해거든요. Happy new year!"
"아니...무슨.."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곧 묵은 해가 흩어질 건데, 그것도 장관이라구요."
학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색의 구체 역시 떠올라 새롭게 생긴 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곤 곧,
"펑! 어때요, 멋있죠!"
어린아이마냥 잔뜩 흥분한 청학이 이건 어쩜 몇 번을 봐도 멋지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그걸 발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작고 둥근 얼굴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일출에 잔뜩 젖어서(학은 그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있으면 왠지,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하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시간도, 나이도, 자신의 존재도 없이, 점점 그렇게 자신을 잊어가게 하는 것이 새해의 묘미랄까, 요.
"그래서 새해에 해가 뜨는 건 아름다우면서도 무척 위험한 일이에요. 잘못 정신을 빼앗기게 되면 다시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설령 자신이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가족일지라도요. 아무리 말해줘도, 나중엔 의사조차 못 알아보고 처음 보는 사람인것마냥 대하게 되죠....저 사람처럼요."
학의 손 끝에는 바다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반인반묘가 앉아있었다. 우수에 찬 두 눈망울,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살랑대는 꼬리.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정신을 빼앗겼다는 건, 어떻게 구분하는 거지? 별로 차이가 없어보이는데."
"저렇게 반은 사람, 반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기억을 잃은 자들이에요. 뭐, 드물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안타깝다는 듯 그 사람을 한번 쳐다본 청학은, 이내 뒤를 돌아 상혁을 근처의 어느 집으로 이끌었다.
아담하고 푸른 계열의 벽돌집이었다.
제 집이에요. 예쁘죠, 그쵸?
대충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 그를 식탁에 앉힌 학이 금세 주섬주섬하더니 무언갈 내 왔다.
푸른빛의 차와, 푸른 색의 케익과 푸른 색을 띠는 과자였다.
온통 파란색 뿐이네. 생각도 잠시, 차를 손수 따라주며 학이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긴 제가 사는 세상이고, 이 곳은 제 관할 구역이에요. 전 이곳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죠."
"관리자라니. 뭘 관리하는데?"
"아, 이곳에는 총 여섯 개의 구역이 있어요. 그리고 각 구역마다 관리자가 있는데, 관리자가 각 구역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죠. 각 구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면 재판하는 역할도 하고요. 근데 전, 아직 재판을 해본적이 없어요. 싸움이 일어난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또 자랑스럽다는 듯 웃는 청학이 퍽 웃겨서, 상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가 이내 싹 굳혔다.
방금은 진심이었다. 왜? 왜지? 하도 저 놈하고 있더니 동화됐나.
혼란스러운 마음에 무작정 앞에 있는 차를 들이킨 상혁은 그대로 그걸 뱉어버렸다.
차가운 잔과는 달리 차는 입을 델 정도로 뜨거웠다.
"아, 제대로 설명도 못해줬네. 그건 이 세상에 하루라도 살게 되면 먹어야 하는 영약인데, 각 구역의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약 성분이 조금씩 달라요. 효능도 다른데, 제가 가지고 있는 건 극소량만 먹어도...."
"아니, 이렇게 뜨거운 걸 주면 어떡하잖 겁니까! 입이 다 데였구만!!"
".....무조건 상대에게 존댓말을 하도록 해 주는 약이에요."
생각과는 달리 순화되어 나오는 말에 상혁이 놀랄 새도 없이, 청학이 만족스러워 하며 씨익 웃고는 이내 과자그릇을 그의 쪽으로 밀었다.
파란색이어서 조금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먹어봐요. 맛있을걸요.
"왜 하필 파란색입니까? 그 많고 많은 색들 중에서."
"음....글쎄요.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의 색이라서?"
"무슨....뜻이죠?"
"삶이 파랑의 끈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소리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파랑의 끈은 또 뭔데요?"
짜증을 내듯이 상혁이 말하자, 청학은 잠시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써서 건네주었다.
[tu dove ti serve]
"이건 뭐죠?"
"그 주소를 따라가요. 길안내는 시간이 해 줄테니."
"누군가를 찾아가라는 뜻인가요?"
"맞아요. 그리고, 주의사항이 있는데, 시간은 그리 착하지 않아요. 당신이 빨리 따라가지 않으면 당신을 져버릴걸요. 길을 잃게 되면 주변의 사람에게 길을 물어봐요. 알려줄 테니. 그 주소는 제 구역이 아닌 곳에 있어요. 그리고 구역 사이의 경계에는 관리자가 없기 때문에, 그곳에 어떤 것이 있든 뒤돌아보면 안돼요. 가장 중요한 건, 절대로, 표범의 구역에는 발을 들이지 말아요. 그는 위험한 자에요. 그럼, 부디."
몸조심 하시길.
"왜, 당신은 같이 안 가나요?"
"전, 제 구역을 벗어날 수 없어요. 구역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제가 아니게 됐거든요. 오직 전령과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사람만 구역을 넘나들 수 있어요."
슬프게도, 그렇게 됐지 뭐에요.
"자, 그럼 어서 떠나요. 종이를 따라가요!"
자신의 손안에 있던 작은 코발트색 종이가 새처럼 접혀 파드득거렸다.
"따라오라는 뜻이에요. 어서요, 가요!"
그러곤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마을의 모든 집의 문이 한꺼번에 닫혔다.
*
"아, 거 좀! 천천히 갑시다!"
아무리 말해봐도 요지부동, 파란새는 줄지 않는 속도로 앞서갔다.
아이씨, 왜 내가 여길 들어와서는....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발을 들인 이상 상혁은 끝까지 가보자 싶었다.
....어?
"놓쳤다....."
방금 전까지 앞에 왔다갔다하던 새가 사라지고 없었다.
'...길을 잃으면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일러줄테니.'
청학의 말을 떠올린 상혁은 마침 지나가던 강아지를 붙잡아 길을 물었고, 그는 조금 소심한 성격인 듯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여기서..멀지 않아요. 저 앞에 있는 가로등에서 달의 쪽으로 이백이십 걸음, 바로 앞에 있는 구역의 경계에서 오백걸음 직진 하면 돼요. 근데 거긴 왜...?"
"무언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요."
"아, 그렇죠 그렇죠. 그 분은 모든 질문의 아버지니까..."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강아지는 곧, 상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했다.
"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구역 사이의 경계에서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 존재' 가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을 거에요."
"영혼이, 뭐요?"
"그럼 살펴 가세요!"
"아니, 저기요!"
여긴 다들 왜 이래...?
인상을 찡그린 상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뒤돌아섰다.
뭐, 어쨌든 가보기나 해 보자. 저기 있는 가로등에서 이백이십 걸음....
그가 걸는 그 길 뒤에 수십쌍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다 시선을 느낀 상혁이 뒤돌아 보았을 때 그것을 거두었다. 술래가 자각하지 못하는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
샤아아아아.
귓가에 이상하고도 끔찍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상혁은 몸서리치며 발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온통 검고 끈적한 늪지대같은 길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무언가 기척은 있었지만 상혁은 모른척했다.
안들린다, 안들린다, 안보인다, 안보인다...
스스로 세뇌하며 옮기는 걸음마다 찐득거리는 타르가 발자국을 남겼다. 온갖 괴이한 생명체들이 드글거리는 곳임이 틀림없는 이곳을 벗어나는 상혁의 귀에 맴도는 말소리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왜 들어온 거야...이 세계에...."
"너도 우리랑 같이 가자...."
"그만 가....네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네게 아무 답도 줄 수 없어....."
"다시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
순간 귀 옆에서 외쳐대는 목소리에 상혁이 기겁하며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으아아아악!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상해, 끔찍해! 온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만 같아!!
기시감에 상혁이 두 팔을 벅벅 문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 소름끼치는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도망쳐나온 그곳에 다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경계가 바뀌면서, 흰색의 타일이 점점이 깔려있는 광장에 다다르자, 상혁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드는 의문, 왜 다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을까.
".....!".
뒤를 돌아 마주한 경계 사이에 사는 그 존재라는 것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이라곤 고작 검은 눈두덩이와 쩍 벌린 입, 일그러진 표정, 길게 늘어지는 두 팔과 다리는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몰골로 먹이를 찾아 허우적대는 생명체가 자신을 탐하려 했던 것에 상혁은 헛구역질이 났다.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을 하는 그의 등이 누군가와 맞부딪히자, 그는 상대가 뭐라 뭐라 하는 것도 듣지 못하고 죄송하다고 웅얼거리고는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괴상하고 끔찍하고 소름돋우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무서워.
*
물어물어 찾아간 주소에는 하얀색의 거대한 대저택이 상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전 청학의 집과는 다른 외양이라, 상혁은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댔다.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겨우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누르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집안으로 초대받고 응접실에 앉아 집주인을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에서 상혁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멍하게 나열된 수순을 밟는 것처럼.
"날 찾아온 이가 있다던데. 당신인가?"
"제가 제대로 온 게 맞다면요."
"....재밌네."
집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는 놀랍게도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무살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그래, 뭐가 궁금해서.....여기까지."
"....학...청학이 여기에 오면 답을 찾을 수 있을거랬어요. 제 질문에 대한 모든 것들, 답을요."
"그 친구는 참...뭐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니까....일단 뭐 좀 마셔. 추워보이네."
"네에...."
추위보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손을 보고 남자는 쯧쯧, 혀를 차다가 이제야 생각난 듯 청학이 보냈다면, 경계의 사이를 건너왔겠구나. 하고 넌지시 물었다.
다시금 떠오르는 그 환영들에 상혁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자 남자는 또다시 혀를 차더니 트레이에서 무언갈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선연히 갈색빛을 띠는 코코아였다.
"자, 긴장을 완화해줄 테니."
"....감사합니다."
그는 잠자코 상혁이 코코아를 입에 머금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상혁이 그의 눈을 피하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그러시죠?"
"음, 아니, 그냥."
그럼에도 입가에 그려진 호선을 덧칠하는 그를 이상한 사람쳐다보는 것마냥 노려보던 상혁이 물었다.
"당신이 제가 궁금해 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던데, 정말이에요?"
"음....어느 정도는."
"제가 질문하려는 것도 뭔지 알고 있나요?"
"글쎄."
싱긋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이름도 모른다는 걸, 그제서야 상혁은 깨달았다.
"아...이름."
"....!"
"내 이름은 궁금해 하지 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거, 기억해서 뭐해. 그래도 정히 알고 싶으면....그냥 우드메이커 라고 불러. 우드라고 불러도 되고."
제 생각을 간파당한 상혁이 자신을 우드라고 소개한 남자를 올려다 보자 남자는 다 안다는 눈빛으로 조소를 날릴 뿐이었다.
"어떻게..."
"쉿, 그런 건 묻는 거 아니야. 그럼, 일단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줘야 겠군. 자,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납시었나?"
"그러니까...."
뭐가 궁금해서 왔더라.
어물거리며 선뜻 입을 떼지 못하자 우드는 이해한다는 고갯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금 이미 경계의 존재들에게 홀렸군. 뒤돌아봤구나, 그렇지?"
"....네."
"그럴 줄 알았어. 그것들에게 홀리면 일시적이든, 그렇지 않던 기억의 일부를 갉아먹히게 돼. 주의하라고 청학이 안 말해 줬나? ....아니, 그냥 궁금해서 뒤돌아 봤던 거군. 이런이런...중간에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토 달 것 없는 진실이라 상혁은 입을 다물었다.
뭐야 여기, 좀 이상해.
몸의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와 금세 자신을 잠식했다.
눈에 구멍이 난 듯 투명한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꺽꺽대는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혁은 울기 시작했다.
시작된 울음은 그치려들지 않았다. 금방 멎을 거라 생각한 이슬방울들은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하염없이 쏟아져내렸다.
"흐으윽, 흐으으윽, ...."
그러나 왜때문에 우는지는 상혁 자신조차도 몰랐다.
모르겠다.
그냥 울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울음을 귀까지 입을 끌어당긴 우드가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드가 그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혁의 울음이 감쪽같이 멎었다. 눈물 때문에 젖었던 손수건도,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자연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충혈된 눈동자로 상혁이 우드를 노려보았다.
"나....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에요!!"
"음, 너 혼자 울어놓고 무슨 뜻일까 그건?"
"당신이 울음을 멈췄다면, 시작도 당신이 한 거 잖아요! 말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죠??"
"....."
어깨만 으쓱하는 우드를 죽일듯이 보던 상혁이 아까 자신이 마신 코코아 잔을 채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짙은 초콜릿 향 사이로 느껴지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왜, 거기에 뭐라도 탔을 까 봐? 이런이런, 잘못 짚었어. 그건 네가 자초한 거야."
"내가 자초하다니, 뭘요?"
"청학이 보냈다니 영약이 뭔지는 알 거고.....내가 가진 영약은 마신 사람의 슬픔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주거든. 절대 내가 한 게 아니란 소리지."
"그 무슨 말같지도 않은...."
"네가 섭취한 양이 얼마든, 지금까지 네가 느꼈던 모든 슬픔에 대해 주체없이 눈물 흘릴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약의 효능이지."
"뭐 그런 약이 다 있어요! 게다가, 아까부터 왜 반말이죠? 나이도 얼마 차이나지 않아보이는데."
"....청학 이 놈을....."
생긋,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있지 않았다. 왠지 모를 살기가 느껴져 상혁은 흠칫했다.
"시간은 모조품에 불과해, 상혁 군.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나이도 먹어가고 있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말이야."
"이곳에선 시간이 모조품이라 여겨지는 건가요? 왜죠?"
"궁금한 것도 많네. 괜찮아, 호기심 많은 아이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으니."
하얀 손가락에 끼웠던 갈색의 반지를 빼낸 우드는 탁, 소리나게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말을 이었다.
"시간은 우리가 삶을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우리가 죽고 나서도 이어질 테지. 시간이란 건 시작과 끝이 없는 것. 삶 역시도 그렇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기 시작하지만 죽은 후에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자들이 많아."
"......"
"한 생명체의 삶이란 건, 이어지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영겁의 찰나일 뿐. 인간은 이름을, 동물은 가죽을, 식물은 거름을 남긴다고 하지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나른하게 목을 푼 우드가 상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왠지 모를 회한을 담은 채로.
"인생은, 인간이 원해서 살아가게 된 게 아냐.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건 더더욱 아니지. 그런데도 죽음을 갈망하기 보다는 자꾸 한숨을 내뱉게 되는 걸 보면, 신은 죽음이 두려워 자기 한탄에 찌든 소심한 인간에게 원망이라는 작은 안식처를 만들어 준 것일지도 모르지."
".....동물에게도 포함되는, 그런 이야긴가요?"
"인간이 아닌 것들은 그렇다 쳐도....인간이라면. 사람이라면 삶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삶을 경험하는 것?"
"아니, 아니야!"
우드가 짜증을 내듯이 소리쳤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탁자를 내리쳤다. 그 서슬퍼런 눈동자와 마주한 상혁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자 이내 우드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으하하하하!"
한참을 자지러지게 웃던 우드가 너무 웃어 숨이 넘어갈 정도로 끅끅대며 겨우겨우 몸을 추슬렀다.
"정말 재밌는 아이야, 넌."
"......?"
"뭐,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그보다.....삶이란, 그저 죽음이 정착지인 여정일 뿐, 그것을 뛰어넘는 목적은 없다. 하릴없이 흘려보내는 시간마저 아픔이니."
그는 시니컬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검은 몸체를 자랑하는 리볼버였다.
"아, 널 죽일 생각은 없어. 그랬으면 이미 죽이고도 남았지."
경계하는 상혁에게 내뱉은 우드는 총을 표독스럽게 쳐다보며 그 총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것도 참....미스터리지. 이 작은 물건으로도 사람이 바로 갈 수 있다는 게 말야. 이 조그만 아이가....한순간에 사람 여럿 목숨을 앗아갈 수 있어. 사실 이 몸체보다도 작은, (철컥) 요놈으로 말이지."
우드는 총에서 작은 총알을 꺼내 책상에 소리나게 내려두었다. 고작 길이 38mm. 이걸로 심장이나 머리를 딱 한발, 쏘기만 해도 과다출혈로 서서히 죽게 만들 수 있다.
"사실 이 작은 아이는, 네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어. 그냥 총을 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날아가 박히는 것 뿐이지. 누구는.....그러더군, 총알이 재앙의 씨앗이라고. 하나 심을 때마다 한 명씩 운명을 달리 하길래."
"......그렇게 위험한 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거죠?"
"아아, 아직 모르는구나. 죽음이란 놈과 나는, 친구거든."
"친구?"
"그래, 친구. 뭐, 독일이라는 작은 나라 말로는 Tod, 라고도 하던데."
"......"
"누구나가 다 죽음과 친구이지만 그걸 각인하는 자는 별로 없지. 때로는 묵인하거나. 사실 지금 이 순간순간에도 넌 죽을 수 있어. 갑자기 저 샹들리에가 떨어진다던가, 집이 무너진다던가, 땅이 꺼지던다든가, 내가 여기 있는 이 총으로 당신을 죽이던가. 아아, 내가 이 총으로 죽인다고는 안 했으니까, 그건 빼고."
두 손을 비비며 우드가 상체를 일으켰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산다고 모든 사람이 죽음과 친구라는 거에요? 아니죠, 죽음은 생명을 앗아가는 적일 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늙든 비명횡사하든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고, 그래서 더더욱 시간을 무서워 하는 거죠. 시간은 죽음의 동반자니까."
"......재밌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제가 어떨 줄 알았길래?"
"뭔가 더....어리석을 줄 알았지. 죽음과 당신이 친구라고 말해주면 대개는 무릎을 꿇으며 어떡해야 하냐고 묻지. 영원한 지속을 원한다는 듯."
".... "
"헌데 그건 속절없는 희망이야. 죽음과 마주하지 않는 자는 없거든. 그 누구도! "
끝맺음이 흥겨운 우드의 말을 곱씹어보던 상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이 친구라는 것도, 총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삶의 목적을 묻는 것도....
아.
"당신, 죽고싶은 거군요."
"........"
"....아닌가요?"
"......글쎄."
대답이 늦다.
이거, 제가 뭘 하나 물은 것 같은데요.
씨익 웃은 상혁이 이젠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
왜, 죽고 싶어하는 거죠?
우드는 아무 말이 없다.
대신 앞에 놓인 제 몫의 코코아를 뜨겁지도 않은지 벌컥벌컥 들이킨다.
입가에 번진 코코아를 손끝으로 닦아낸 우드가 여즉 내리지 않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이런, 알아버렸네."
낄낄대던 우드는 주머니에서 은색 열쇠 꾸러미를 꺼내더니 그 고리를 손 끝에 걸고 빙빙 돌렸다.
"너는 답을 찾았어. 그러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군."
"당신 자체가 제 질문의 답이었나요?"
"문은 네 오른쪽이다."
"....그것 참, 감사하네요."
상혁이 어느새 제 오른쪽에 생긴 묵직한 나무문을 밀어열었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점점 고운 미간을 좁히는 우드를 주시하면서.
*
문밖은 바로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짧은 새에 해가 진 것인지, 어두컴컴한 골목이 그를 반겼다. 도무지 모르겠는 시간대이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다들 자고있는 듯 했다.
아니, 애초에 자기는 했던 건가?
해가 그렇게 자주 뜨고 지는데 밖이 그렇게 환해서 잠이 오는지나 몰라.
어두운 거리를 정처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상혁은 광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벤치에 앉아 몸을 누이려 했다.
그 순간, 고막이 찢어질 듯한 큰 목소리에 그는 몸을 퉁기듯 일어섰다.
"네 이놈!!!!!"
상혁은 몸을 돌려 제게 소리친 이를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여몄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명 앞,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노란 눈의 표범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표범이 한발 한발 다가왔다. 흑표범이 나무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와 상혁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경악에 찬 상혁의 뇌리로 청학과 강아지의 경고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표범의 구역에는 발을 들이지 말아요...'
우드의 구역과 표범의 구역이 맞닿아 있던걸까, 아니 우드의 구역에 표범이 제멋대로 발을 들인걸까. 헌데, 구역을 넘어 돌아다니는 것은 전령이나 이 세계에 살지 않는 사람이라 했는데. 표범 역시 관리자일터, 그렇다면 어째서 표범만 구역의 경계를 무시할 수 있는걸까, 상혁은 생각했다.
"드디어 찾았구나."
"뭐, 뭘 말입니까?"
"나를 감히 치고도 사과 하나 없이 도망간 놈."
".....네?"
어이없는 대답에 상혁은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애초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보고....
"설마, 아까 그 광장....!"
"그래, 바로 거기. 사과도 없이 그냥 가면 좀 섭한데."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 때 바빠서...."
"저 집으로 들어갔던 것 같던데. 맞나?"
그의 말을 끊고 우드의 집 쪽을 가리킨 표범에게 상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가 거기로 찾아가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고 해서요...."
"그래, 저 놈은 모든 걸 다 알지. 어느정도는 완벽히 다. 넌 뭐가 궁금해서 왔지?"
".....글쎄요....."
"그것도 모르면서 찾아갔단 말인가? 에잉, 쯧쯧...."
혀를 찬 표범은 상혁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해서, 답은 얻었나?"
"......아직 찾는 중입니다."
"다시 들어가기는 힘들텐데. 여기 있는 걸 보면 분명히 네놈을 쫓아낸 걸 테고, 저 놈은 쫓아낸 아이를 다시 제 구역에 들이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는 답을 못 찾은 것 같은데, 저 우드라는 놈은 제가 이미 답을 찾았다고...."
"거기서 의문을 가져야지. 거기서 질문을 가지고 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보면 자연스레 네놈이 가진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어."
나른히 고개를 젖히며 하울링을 한 표범은 고개를 까딱, 하며 앞장섰다. 따라오라는 제스쳐였다. 그것에 홀린 듯 따라가며 상혁은 혹시 청학이 조심하라는 표범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청학이 조심하라는 표범이 이 표범이 아니던가.
말없이 표범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가던 상혁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더 깊은 수렁으로 발을 딛는다는 것을.
*
표범을 따라간 곳에는 오래된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랗고 고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겉만 오래된 듯 하지 그 속은 따스한 붉은 색의 벨벳 소파와 밝은 샹들리에, 제 주인에게 깍듯하게 고개 숙이는 집사와 하녀들, 그리고 어느 누군가의 할아버지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을 사람들의 초상화가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네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미려했고, 그 태도들도 고매하여 상혁은 내심 표범이 그렇게 나쁜 이는 아니라고, 성격도 곰살궂은 것이 틀림없다 생각했다.
"자, 천천히...옳지. 그래, 거기에 앉으면 돼."
.....물론 왜 다들 자신을 보고 반말부터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지만.
역시 붉은 빛을 띠는 아늑한 러그에 앉은 상혁은 두 손을 쥐락펴락하며 표범이 무슨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표범이 무언갈 먹으라며 권하지 않아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신 표범이 내민 작은 상자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뭐죠."
"열어봐."
고개를 까딱한 표범은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노란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되려 뷰자데를 느낀 상혁은 검고 네모난 것을 집어들었다.
".....열쇠, 네요."
"빙고. 그게 필요할 테니."
"그런가요. 어째서 필요할 거라 생각했죠?"
"방은 저쪽이야. 필요한 건 다 있을테니 아무데서나 자면 되고. 내일 아침 44시까지만 1층 거실로 내려오면 돼. 그럼, 나는 이만."
"아니, 저기...!"
제 할말만 끝내고 사라져버린 표범을 향해 상혁이 채 내밀지 못한 손을 거두며 머리를 짚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아이고, 두야.
*
방에 들어선 상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생 자신이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곳이 바로 이곳인 걸까. 붉은 침대, 붉은 휘장과 곱게 개켜져 있는 실크 수건들,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 포근한 새틴 이불, 한 쪽 구석에서 타고 있는 벽난로, 좋은 향을 머금은 향초들, 두툼하고 고급스런 샤워가운, 셋이 나란히 누워도 남을 듯한 커다란 침대, 그 옆에 잘 차려진 저녁식사.
"....전부 다 붉은색이네."
방 안에 있는 것 중에 붉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벽지부터 시작해서 슬리퍼, 이불,침대, 베개, 가운, 옷, 심지어는 방 바닥에 깔린 카펫마저 붉었다.
표범이 붉은색에 환장하나, 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밀어넘겼다. 음, 자기 취향인데 뭐.
호화로운 부잣집 도련님마냥 옷을 갈아입은 상혁은 뜨끈한 물에 목욕도 마치고 식탁 앞에 앉았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러운 빵, 이국적인 굴라쉬와 크림이 담뿍 들어간 스프, 뜨거운 돌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두꺼운 스테이크, 해산물 리조또, 알 덴테로 익혀진 토마토 파스타, 둥글고 각종 재료들이 잔뜩 올라간 피자.... 모두 양식이었으나 상혁은 거부감 없이 그것을 입가에 대었다. 물론 이 음식들 어딘가에 표범이 가지고 있는 영약이 들어갔음을 확신하면서.
맛은 놀라우리만치 훌륭했고, 그는 식탁 위에 있던 음식들을 거의 다 비웠다. 얼마만에 제대로 하는 식사인지, 기분좋은 포만감에 나른해진 상혁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누였다. 오랫동안 걷고 얘기하며 깨어있어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베개에 머리를 묻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끼익, 그가 잠든 방의 문은 침입자를 알렸다.
*
달이 눈을 치뜬 그 밤, 상혁이 몽혼한 세계에 젖어든 그 밤.
알면서도 시작한 일이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손을 무작정 집어넣었던 게 잘못이었다. 처음엔 살기 위해서 시작한 도둑질이, 이젠 폭행과 살인마저 서슴지 않았다.
아주 처음, 어느 남자의 지갑을 손에 넣었을 때 느꼈던 떨림은 두려웠고, 심장이 뛰었으며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동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며칠은 굶지 않겠다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에 그는 한동안 방황했다.
그것도 잠시, 그랬던 초심은 무디어졌고 점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음으로 전락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값나가고 효용가치가 많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갑을 손에 넣었고 버렸다.
손이 잽싸고 걸음도 빨라 잡히지도 않았다. 지갑을 갖게 되면 일단 신용카드같은 것 따위는 버렸고, 현찰만 빼내 손에 쥐었다.
그러던 언젠가, 그는 양복을 빼입은 남자의 뒷주머니를 탐하다 꼬리가 밟혔다. 잡히면 최소한 벌금행임을 직감한 그는 자신에게 변호사 따위를 선임할 돈도 없다는 것을 더 잘 알았다.
어리지만 영악했던 그는 주변에 사람이나 cctv가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남자를 때려죽였다. 맨홀 안에 욱여넣어 마무리해 남들이 보기엔 사고사처럼, 그렇게 마무리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그래도 가슴 한켠에 남아있는 양심이란 작은 새싹이 디밀기 시작할때마다 상혁은 그것을 잘라내었다. 아니, 태워버렸다.
꼬리가 밟힐 때마다 때리고, 패고, 나중에는 칼을 하나 구해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다.
여차하면 죽이려고.
꼬리가 밟혔다 치면 바로 인적드문 골목골목으로 튀었고, 그곳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상혁에게서 살아남았다. 끝까지 달려온 이에게는....글쎄.
자신이 사는 동네에 살인하는 소매치기가 있다고, 그리고 그 소매치기는 자신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물적 증거도 없이 법정에 세울 순 없었다.
일단 지갑 없는 시체가 있다하면 경찰에선 상혁을 참고인조사로 불러대곤 했다.
능글맞게 그때마다 이리저리, 시종일관 오만한 태도를 놓지 않고 형사들의 피를 말려 죽이는 건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대답을, 자백을 바라는 형사들이 원하는 그 말을 에둘러 대답하고 또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하는 그네들의 짜증내는 얼굴을 볼 때면 가소롭고 또 멍청해 보였다.
그래서였다. 범행은 점점 대담해졌고, 그 어떤 경찰도, 형사도 자신을 잡아넣지 못했다. 기껏해야 유치장에 잠깐 발을 묶어놓을 뿐, 더 이상 추궁하려해도 상혁은 요리조리 잘만 빠져나갔다. 불려올 때마다 형사들 놀리는 재미도 쏠쏠했고 이젠 이름과 소속도 외울만큼 그는 경찰서를 제집마냥 들락거렸다.
그러던 차에 오늘 이렇게 불려왔던 것이다. 그렇게 청학을 만나고, 우드를 만나고, 표범을 만나게 되고.
"오늘은 아닌데."
적어도 오늘은, 난 죄가 없어. 그러니까 조금은 떳떳해져도 돼.
"언제까지 안위하면서 살거지, 네놈은?"
".....!"
잠에서 깨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상혁에게 어느새 들어온 표범이 물었다.
"언제까지고 그런 안일한 생각만 하면서 살래, 응?"
".....미안합니다."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이윤 없고. 그나저나, 용케 깼군. 약을 탄 게 무색하도록 말이야."
"수면제, 였던 겁니까?"
"아니, 네놈의 기억 한 티스푼."
"......."
"얼마나 멋있었는지 보려 했는데.....볼 것도 없군 이제. 참 퍽도 자랑스러웠겠어, 하? 맛도 없겠어 네놈은."
"맛....이라니요?"
"응? 아아, 맛."
네놈처럼 맛없을 것 같은 놈들은 말야....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은 표범이 바닥을 툭툭 찼다.
"내 집을 채우는 데 일조하지. 붉고, 선명하게. 예쁘잖아?"
"....!!!"
"자아, 그래서. 네놈도 맛이 없을 듯 하니 이를 어쩐담. 지난주에 필요한 건 다 만들었는데...."
이참에 스툴이라도 바꿔볼까.
탐욕스럽게 상혁을 바라보는 시선이 숨이 막힐 듯 상혁을 조여왔다.
"사, 사, 살려주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세요, 전 아직, 아직....."
"아직, 뭐? 내가 왜 네놈을 살려주어야 하지?"
"그, 그거야....!"
살아야 해서?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내가 아직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답을 찾았네."
".....? "
"가, 여긴 네놈이 담을 그릇이 아니야. 뒤도 돌아보지 마. 꺼져!!"
갑자기 흥분해서는 목까지 시뻘게진 표범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맛이 이렇네 저렇네 하던 표범의 말을 군소리 없이 따르기는 하나, 상혁은 미심쩍은 눈빛을 계속해서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을 죽여 가죽으로 만들어? 그래서 그렇게 방들이 붉은거고? 그리고 난, 그 가죽 위에서 잠을 잤다, 고?
순간 몰려오는 헛구역질에 상혁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향했다.
우욱, 우우욱!!
방 안을 어느새 채운 헛구역질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올 때마다 상혁은 속을 게워냈다. 아까 먹었던 정찬이 형체를 알 수 없게 나올 줄 알았더니, 되려 속에서 나온 것은 울긋불긋 탐스럽게 물든 붉은장미꽃잎이었다.
"헉, 허억, 우욱!!"
"이런, 힘들하지 말고. 내가 편하게 해 줄게...."
"아니, 난 절대로 네놈 뜻에 맞춰주지 않아. 절대로!"
"그래...? 그런데 어쩌나. 어차피 넌 내 말을 듣게 될 텐데. 뭐, 마음대로 해 봐 그럼!!"
크레센도와 데크레센도를 넘나드는 표범의 성량에 놀란 상혁이 뒷걸음질 치자 가소롭다는 듯 표범이 웃었다.
아직 어리구나, 아이야.
저를 비웃는 목소리가 상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반말부터 내려다 보는 시선까지, 어느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아아, 혹시 표범의 또라이같은 기질을 우려해 표범의 구역에 들지 말라고 한 것일까?
문득 드는 생각에 상혁은 마른세수를 하는 표범을 내려다 보았다.
"....."
"왜, 궁금한 거라도 있으면 물어보지, 귀찮게 알짱대지 말고."
상혁은 왜 표범을 피하라고 했는지 알것만 같았다.
"....."
".....뭐, 왜."
"아니, 아니에요. 그냥...."
"그냥?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상혁 군. 왜 묻지 않아? 내가 너를 어째서 내 집에 들였는지, 라든가. 왜 사람가죽으로 집을 만들었다던지...."
"그걸 콕 집어서 다시 말해줘야 합니까?"
"왜, 사실이고, 난 도망치지 않아. 그게 무엇이든."
"....또라이."
"네가 감히 나한테 또라이라고 해?!? 아니....그럴 수 있지."
"당신 무슨 이중인격자야?!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내가 그렇든 않던 무슨 상관이니, 아이야. 네 놈은 네 놈이나 챙겨!"
시도때도 없이 화내고 진정하는 표범의 말투와 행동에 상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치 바이킹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처럼. 시시각각 요동치는 성격에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상혁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갈 곳은 정한거니?"
"....아니요."
그보다 표범이 아직도 자신을 죽일 마음이 있는지 상혁은 그것이 궁금했다. 아까 잠깐 보여줬던 그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는데, 과연 속마음도 그럴까.
상혁은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지 않는 게 좋을텐데."
한숨소리와 함께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
"저기요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저기요!"
"으음...."
묵직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들리는 이명과 낯선 목소리.
"제가 보이세요? 당신 이름, 생각나요?"
"윽, 머리가..."
"힘들면 말하지 마세요. 잠시만 누워계세요, 수건을 갈아야겠네."
"혹시...여기가 어디죠?"
"여긴 제 집이에요. 당신이 경계의 사이에 누워있길래, 제가 데리고 온 거구요. 좀 쉬세요 그럼."
"....."
어제 난, 아니 어제인지 오늘인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마지막 기억은 이곳이 아니었는데. 난, 표범과 함께였고 표범을 피해 도망쳤지만 잡혔지.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조각조각 기억나는 것은 흐려진 시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으아악!"
기억 속 자신의 옆에 경계 사이의 그 기괴한 것이 손을 내밀고 있어 상혁은 기겁하며 눈을 떴다.
푹신한 침대와 밝게 짓쳐들어오는 햇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얌전히 협탁에 올려져 있었다.
자신의 꼴이라도 정리하려고 거울을 찾던 상혁은 멈칫했다. 방 어느 곳에도 거울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목소리는 누구지.
이것저것 상념에 젖어든 상혁이 답답함에 짜증을 낼 즈음, 그제서야 닫혔던 문이 열리며 쟁반에 무언가 받쳐든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직 누워있어야 될 텐데. 괜찮아요?"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요, 우리."
미묘하게 누군가를 닮은 듯한....
"맞아요. 구면이죠? 먼젓번에 길 알려줬던 사람입니다."
"아...그땐 동물이었는데?!"
완전한 동물이었던 광장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남자는 꽤나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눈썹 위 스크래치, 그리고 손목에는...낙서인가? 아니면 문신?
"수인이죠. 아직은."
"그렇군요..., 아직이라니요?"
"....수건을 좀 갈아줄게요."
질문에 흠칫 놀라며 말을 돌리는 그 남자를 보며 상혁은 직감했다. 이 사람, 자신이 알면 안되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숨기고 있고.
도대체 왜지? 무얼 숨기려는거지?
"엿차, 다 됐습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하시진 않으시구요?"
여전히 흔들리는 눈동자. 거짓말을 못함을 사방팔방 다 알려오려고 작정한 듯한 떨리는 목소리.
"왜 감추는 거에요. 나한테서 뭘!"
"...네?"
"다 알아요 그러니까 숨기지 마요! 청학은 구역 사이의 경계는 전령이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사람만 이동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건 왜죠? 당신도 관리자, 맞죠. 청학이 거짓말한 건가요? 영약은, 도대체 뭐고, 왜 당신이 수인이라는게 아직은, 이라는 뜻이죠. 대답해요!"
"그, 그건....."
방황하는 눈동자가 애처롭게 부들거렸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그 눈에서 투명한 눈물까지 쏟을 기세였다.
"다, 다 얘기할게요. 그러니 제발 진정해요...!"
울먹거리며 상혁을 제지하는 남자의 손끝에서 미요한 떨림이 잦아들자, 그는 몸을 기울여 침대옆의 의자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연한 어린잎차의 향이 둘을 감싸는 그 사이로 남자가 상혁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이런거 말하면 안되는데...."
"...."
"알았어요 말할게요.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요..."
또 금세 차오르는 눈물에 상혁이 이마를 짚었다. 하, 젠장. 간만에 그래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는가 싶더니...!
"제가 하는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면 안돼요. 심지어 혼잣말두요. 요즘은 나무들 중에서도 편이 갈려 있으니까...."
"....."
"청학을 만났다니, 여기가 총 여섯 개의 구역인 건 알겠네요. 각 구역마다 관리자가 있고, 관리자는 다른 구역에 오갈 수 있어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사람과 전령두요. 그리구...여기서 하루 이상 살게되면 각 구역의 음식을 먹지 않고는 못 배겨요. 몸이 버티질 못하거든요."
나름 따뜻한 배려였던 걸까?
"아까 상혁씨가 물었던 것처럼 저는 이 구역의 관리자가 맞아요. 다른 구역은 각각 청학, 우드, 표범, 저, 그리고(여기서 남자는 몸을 떨었다) 백호, 뱀보가 맡고 있지요. 이 중에서는 표범이나 우드가 가장 영향력이 가장 높아보이지만 실제로는 백호가 가장 힘이 세요. 다섯명이 덤벼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요."
후, 한숨을 내쉰 남자가 안쓰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청학도 사실 불쌍하죠. 자기 구역에 발묶여서 다른 지역으로 가지 못하게 됐으니."
"발은 왜 무,"
"거기까지만. 더 이상은 알려주기 곤란해요. 저도 제 목숨은 지켜야겠어서...."
살짝 눈치보던 남자는 대신 다른것을 알려주겠다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제가 아직 수인이라고 말한 건, 제가 힘이 없어서에요."
"힘이 없다니. 네가?"
"애석하지만....네. 백호의 눈밖에 나버린건 저뿐만이 아니지만, 그나마 저는 다행이죠. 반인반수 정도로 그쳤으니까."
"......"
"벌을...., 받은거죠.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마음에 들지 못해서....저도 원래는 인간이었지만, 이젠...반쪼가리밖에 안 남았네요."
"백호가 그렇게 센가요? 저항도 못하고 벌을 받을 정도라면?"
"네..., 아까 말했다시피. 다른 구역의 관리자들 모두가 도와도 안돼요. 힘의 클래스가 다르달까요.... 사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같아요. 아예 신, 같다고 말하면 조금 이해가 될까요?"
"왜 그가 벌을 준 거에요? 힘이 없다는 당신이 얼마나 위협이 됐길래?"
"음...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렇게 약하지는 않았어요. 마법사였죠. 하지만 완벽한 몸을 갖고 있지 않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말았죠."
"....."
"뭐, 그래도 지금이 더 나은 것 같기도.....어쨌든 간에 더이상의 위협은 받지 않으니까요. 사실 불가항력이거든요...백호의 말을 거역하기가."
"왜죠, 그가 '신'같은 존재라서?"
구태여 '신'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상혁에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그는,
"이 세계의 창조자니까요."
"....!"
"모든 걸 그가 만들어냈죠. 구역들을 나눈 것도 백호, 우리를 만들어준 것도 백호, 우릴 관리자로 각인시킨 것도, 우리가 관리해야 할 구역이건, 그 구역 사람이건 모두 그가 만든 것들이에요. 아무도 백호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르고 그 존재 자체도 모르죠. 실은 존재 자체도 의문이에요. 비밀에 싸여있죠."
"정말, 진정한 의미의 '신', 그 이상인 것 같은데요. 그가 정말 그런 존재라면, 그 백호는, "
잠깐, 잠깐만요!
갑자기 남자가 놀라며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쉿! 집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있어요."
엿들었으면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며 그가 안절부절하지 못하자, 되려 당황한 상혁이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아요? 확신할 수 있어요?"
"제 힘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거든요. 아직은 써먹을 수 있어요."
아까 말 못해서 미안해요. 어느 구역이든 백호에게 그곳의 소식을 알려주는 전령이 있어요. 무엇이든지 변할수 있는 터라, 어느 장소에 무엇으로 둔갑하고 있는지는 저조차도 느낌만 있을 뿐, 확실히는 몰라요.
"어느때는 동물, 사람, 심지어는 나무나 돌로 변해있을 때도 있고요."
"종잡을 수가 없다는 소리군요. 그럼 만약....당신이 백호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했는데 그걸 전령이 듣고, 백호에게 전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
죽겠죠.
제법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의 손 끝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괜찮은 척 하기는....
쿵쿵 날뛰는 심장을 제 몸에 가둬 억누르며 손톱을 손바닥에 꾸욱 눌러 두려움을 참는 그가 괜히 안쓰러워 보여서, 상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서, 지금 밖에 있는 사람은 괜찮은 건가요? 백호의 편은 아니고요?"
"음, 잠시만요..... 아, 다행이에요. 아무도 없었네요.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감시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까.
"당신도, 다른 사람에게 감시당하는 기분, 뭐지 알죠."
"....그럼요."
매일 취조당하고, 형사들은 윽박지르고....
"범죄자 취급 당하는 게 일상인데요 뭐. 이젠 저도 익숙해서...."
곤란한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던 상혁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는 있는건가.
"난....언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죠?"
"집에, 가고싶은 거에요?"
"집이랄 것도 없지만....뭐, 그렇죠. 청학과 다시 만나면 집에 가는 방법도 알려줄까요. 어쨌든 여기 데려온 건 청학이니까...."
"설마, 당신, 그 물방울을 통해 여기 들어온 건 아니겠죠?"
"맞는데요. 왜,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이런....!"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찡그린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청학이 아니군요. 그건 전령이에요...! 오직 전령만이 물방울을 통해 이 세계로 들여보내줄 수 있어요. 혹은....청학에게 백호가 직접 명령했거나. 둘 중 하나에요."
"뭐, 뭐라고요?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굵은 선을 가진 상혁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남자는 손을 내밀며 작게 덧붙였다.
어쩌면 백호는...처음부터 당신을 노리고 이곳에 초대한 것일지도....
"백호 그 자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거에요 지금? 그 무슨 말도 안되는...!"
"방법은 하나에요. 백호가 당신을 원하니, 당신이 백호를 만나는 것. 그것 외에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네요. 그 사람이 당신을 이곳에 들여보내주었으니, 내보내는 것도 백호가 할 수 있어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죠."
"....불가항력인가요, 그거?"
"구십프로 이상은요. 이건 당신의 운명이에요, 그러니 받아들여요. 어쩔 수 있는게 있고 어쩔 수 없는게 있지만....이건 저도 건드릴 수 없는 부문이라...대신 백호에게 데려다 줄 수는 있어요."
그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으니까...
"읏차, 다 됐다."
꽤나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남자가 그린 것은 작은 마법진이었다. 백호에게 데려다 준다며 분필을 집어든 남자에게 한 쪽 눈썹을 치켜들던 상혁의 눈매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탄에 가까워졌다.
"정말 이걸로, 바로 백호한테 갈 수 있나요?"
"그럼요. 제 실력 아직 죽진 않았다구요. 자아, 거기 한가운데 서시고...네, 거기, 바로 거기요. 준비 되셨으면 눈 감으시고....그렇죠. 금방 도착해요, 정신 꼭 차리고요. 백호는,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에요. 너무 긴장하지는 말구..."
자신을 걱정해 주지만 어설프게 웃고 있는 입가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저보다 더 떨고 있는 것을 은연중에 눈치챌 수 있을만큼 흔들리는 동공이 백호가 그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눈 감았으면....이제 이동할게요."
조심스레 통보한 남자의 손끝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까지 보고는 상혁은 눈을 감았다가 금세 바로 떴다.
*
새로운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청학, 우드, 표범, 수인의 구역을 거쳐오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절경이 자리하고 있는 백호의 구역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해도 될 만큼 농익은 과일들과 푸르른 초목들이 가득했다. 도시와 숲속과는 확연히 다른, 낙원이었다.
"드디어 왔군."
".....당신이....백호인가요?"
등 뒤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상혁은 고개를 휙 돌리고는 제 눈 앞에 자리한 흰 털의 호랑이를 올려다 보았다. 새하얗고 깔끔하게 빗어넘긴듯한 외양은 여느 호랑이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예의가 없구나."
"....뭐가요?"
"아, 이런. 나보다 먼저 만났던 사람들이 있구나. 청학, 우드, 표범...그리고 그 자 까지. 저런저런....또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놨겠어. 초대한 건 나인데."
"당신은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죠?"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따라와."
아무리 물어도 깔끔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상혁은 속이 상했다. 하지만 말에 주술이라도 걸려있는지, 머리로는 거부하면서도 몸은 그를 쫓아가고 있었다.
"저기 근데 혹시,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ㄴ..."
"다 왔다. 문은 저쪽이란다."
"......"
백호가 가리킨 그 곳에는 푸른 덩쿨로 둘러싸인 작은 문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곳에 이끌린 상혁은 자신이 백호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지조차 망각한 채 손잡이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끼이이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속에는 검은 어둠이 가득했다. 암흑 속에서 일렁이는 불꽃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백호에게 길을 터주었다.
딱! 가벼운 파찰음이 들림과 동시에 흑으로 물들어있던 방이 백으로 바뀌었다. 순간적으로 밝아진 실내에 눈이 부신 상혁이 눈살을 찌푸리자,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의 중앙으로 걸어들어갔다.
"여긴...."
사방이 거울로 이루어져있는 방이었다. 정사각형의 방에서 수십, 수백명의 상혁과 백호가...아니. 거울 속에는 상혁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흥미롭다는 듯이 거울을 쳐다보는 백호와 거울 속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던 상혁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히 제 옆에 있는데도 거울에 비치지 않는 백호는, 귀신인것마냥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왜 여기....!"
다시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 상혁은 자신 옆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한발을 내딛었다.
"읍읍읍!!"
"어쩌다 그렇게...잠시만요 내가 풀어줄게요!!"
"...소용없단다."
윤기나는 털을 흔든 백호가 등을 돌렸다.
"내가 묶었거든, 그 아이."
"....왜, 왜 그랬죠?"
의자에 꽁꽁 묶여 안대에 재갈까지 물고있는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상혁이 따지듯 물었다.
"질문은 내가. 이런, 아이야, 여긴 내 세상이란다. 함부로 나서면 안될텐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다고! 난 여기서 살지도 않는데."
"아이야, 뻐꾸기가 어떻게 집을 짓는 줄 아니?"
"...말 돌리지 마시죠."
"대답."
"....나뭇가지를 엮어서?"
순순히 대답을 내어주는 생각과는 다른 입술에 상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틀렸어. 뻐꾸기의 부모들은 알을 낳을 때가 되면...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다른 새의 둥지에 기생하는 거지."
"......"
"그렇게 태어난 새끼들은 원체 그 둥지의 주인이 낳은 알들을....."
툭, 제 앞에 떨어져 노란 액체를 뱉어낸 작고 하얀 것을 발견한 상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떨어뜨리지. 미리 경쟁자를 제거하는 거야."
"....살인자."
"자연의 섭리는 잔인하지, 때로는. 죽고 죽이는 게 야생이고, 그게 치열한 살아나기란다, 아이야."
"그런 자연의 섭리 어쩌구가 뭐, 나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쯧쯧, 아직도 저렇게 이해를 못할까.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을 찡그린 백호가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겼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상혁을 올려다보던 남자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의자가 부서질 듯이 온몸을 발버둥쳤다!
"으읍, 으으윽!!"
"왜, 왜 그래요! 제가, 제가 풀어드릴테니까 잠깐만 참으세요!"
경련이 온 것마냥 부르르 떨면서 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남자의 재갈을 떨리는 손으로 풀어내던 상혁이 헉헉대며 뒤로 물러났다.
재갈이 풀림과 동시에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하자마자 남자는 귀청이 떨어질것만 같이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아냐! 이건 내가 아니야!!!"
"지, 진정해요! 진정!! 어, 어떻게 해 줄까요! 알려, 알려줘요!"
"거울, 거울을 치워!! 저건 내가 아냐!!!아아아악!!!"
"....자아, 이제 그만."
이미 많이 참았어.
백호가 손을 퉁겼을 때, 남자의 신들린 듯한 비명소리가 멎었다.
툭, 끊어져버린 퓨즈처럼 풀린 눈으로 남자는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
"이제야, 조용하네."
만족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은 백호가 다시 손을 퉁겼을 때, 남자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아, 그럼 또 하나의 경쟁자가 남았네."
인형같은 얼굴로 살기를 내뿜는 백호의 두 눈을 마주한 상혁의 오금이 저려왔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단 한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경쟁자, 경쟁자라니! 고작 그 이유로 저 사람을 주, 죽인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저 사람을 수인으로 만든 것도 당신이면서!!"
"내가 말했잖니. 이게 경쟁하며 사는 삶이라고. 이 하나의 공간에 사는 이상, 서로 물고 뜯고 쫓고 쫓기는 관계는 끝나지 않는단다."
"......"
"네가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또 있구나."
꼭 만나길 바란다. 너의 역할은 그 아이를 만나는 것까지 이니.
백호가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을 때, 상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예닐곱이나 먹은 어린아이만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거울도 방도 낙원같은 구역도 없이.
"....안녕."
"아, 안녕."
이제는 섬짓하기는 커녕 놀라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놀랄 것 투성이었다.
"...네가..."
"응. 내 이름은 뱀보야!"
해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던 상혁은 그 미소를 따라그리다가 얼굴을 굳혔다.
누군가와 닮았다.
누구지?
단정하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에서 상혁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 아이-
"형, 음, 형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겠지?"
"어, 어어."
생각에 빠져 있다가 기습적으로 받은 질문에 그가 적잖아 당황해하는 것을 보고 아이는 되려 피식, 웃었다. 웃는 눈매가 길게 접히는 게 마치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은 듯 해서, 그는 자꾸만 아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청신하거나 경결하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고매한 느낌이 물씬 나는 아이였다.
부잣집 아이...라기보다도 잘 큰 아이. 말라 보였지만 굶은 것 같지는 않았고, 윤기나는 머리칼과 하얀 얼굴은 뽀득뽀득하게 씻어 깨끗한 어린아이의 그것 같았다.
"형. 있잖아. 난 여기서 평생을 살아왔어."
"...여기는, 어딘데?"
"내 구역이지. 제 6구역. 근데 내 구역엔 나밖에 안살아. 그러고 보니까 이렇게 다른 사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네."
"왜 혼자였던 거야..? 다른 구역에 갈 수도 있잖아."
음- 그건 나도 몰라.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멋쩍게 웃었다. 배시시 짓는 웃음 그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은 보이지 않아서, 상혁은 깨달았다.
이런 삶을 너무 오랫동안 살아와서, 이젠 포기한지 오래된 거구나.
"밖에 나가면 백호가 싫어하는걸. 나도 나가고는 싶은데..."
시무룩해하던 아이는 또 금세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상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뭐, 괜찮아! 이렇게 손님도 오고. 형, 근데 그거 알아? 형, 사실 형이 내 구역에 온 첫번째 사람이야."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가지 않는 모습에선 아이가 얼마나 혼자 아등바등 했는지, 이젠 그 길에서 체념이란 동반자와 주저앉아 버렸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괜히 아이가 안쓰러워서, 상혁은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우수에 찬 눈망울을 보지 못한 척 했다.
오랜만에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 즐거워 경계하지도 않고 쉴 새 없이 쫑알대는 아이의 모습에서 친구 없이 혼자 놀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리고 그 끝에 느껴지는, 잔상. 환멸. 두려움을, 상혁은 홀로 짓씹어 삼켜버렸다.
더 이상 떠올리기에도 벅찬 것들이었다.
"아 근데 형, 나도 들은 얘기지만...내가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말야. 어쩌면 그거랑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백호가 그랬는데, 나는 여기 사는 여섯 관리자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래."
"왜?"
"내가 다치면 이 세계는 없어질 수도 있다고, 백호가 그랬어. 그래서 밖에 못 나가게 하는 것 같아. 나, 사실 다른 관리자들은 한 번 밖에 본 적 없어. 내가 제일 처음 여기를 만들 때...."
"네가 여길 만들었다고? 관리자들도, 백호도?"
"응! 제일 처음 만들 때 빼고는 다른 관리자들은 본 적 없어. 백호도 내가 가장 처음으로 만든 관리자인데?"
"....."
죽은 그 남자의 말은 뭐였을까.
"근데 안 만들 걸 그랬나. 요즘은 너무 심심해."
"그럼, 너 혹시 청학이 왜 자기 구역을 못 벗어나는지 알아?"
"음....청학은, 다른 관라자들의 질투를 사니까?"
"무슨...뜻이야?"
"청학이 제일 맑고 구역 관리도 잘 하잖아. 그래서 가둔거 아냐? 다른 관리자들이 시샘해서."
"그런가."
뱀보의 말은 아리송했다.
청학이 일을 잘한다고 해서 가둘이유는 없지 않나?
"네가 여길 만들었으면, 네가 제일 힘이 센 거 아냐?"
"원래는 내가 더 셌는데, 갑자기 백호가 힘이 세졌어. 그래서 나보고 다치지 말라고 여기 있으라고 하구, 어, 자기가 다른 관리자들 하고 일하겠다고 했어."
"......"
경쟁자를-없애는 일.
"음, 그 얘긴 그만하고, 예전부터 사실 만나보고 싶었어, 형. 궁금했거든."
"내가? 왜?"
"어어...누구나 자기 미래를 알고싶어하니까?"
".....그렇지. 누구나....뭐??"
"내 미래."
상혁을 손 끝으로 가리키며 하얗게 웃는 얼굴엔 반가움도 뭣도 아닌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니아니...내가 네 미래라고? 그럼 잠깐, 내가 너의 미래면 너는 나의 과거라는 뜻이야??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얼떨결에 만난 어릴 적의 과거-아니, 이 아이가 나의 과거인 줄은 모르겠지만-아니, 아니야. 이게 말이 될 리가 없잖아.
"꼬마야, 도대체 넌......"
누구니.
"형은 나고, 나는 형이야!"
".....줄곧...."
모든 게 다.
아니, 처음부터.
내 인생이 시작될때부터.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전부..."
댕-댕-댕-
그 때 들려오는 청아한 종소리에 상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건 무슨 소리야.
"어? 벌써? 아직 많이 못놀았는데...."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뱀보는 이내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또 놀러와!"
뱀보가 씨익 웃었을 때, 그의 세상은 빛을 잃었다.
어디서 무엇이 튀어날올 지 모르는 새까만 암흑이었다.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한기에 상혁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추웠다.
톡톡톡.
여긴 어디지?
톡톡톡.
나는 한상혁이야.
톡톡톡.
나는 백호야. 아니-
나는 네놈의 주인이야.
"자 그럼, 이제 깨어납니다."
제 6구역, Fin.
By. Purp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