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FTER DARK : LUMINOUS
잉뿌
@my40630
⚫AFTER DARK - VIXX
I HATE THIS AFTER DARK
이밤이 또 지나고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난 버틸 수가 없어
⚫LUMINOUS
:[형]어둠 속에서 빛나는
“항상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거란다. 네온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야. 에어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
“저 가야해요, 절 보내주세요. 구해야 해. 희생, 그런 거 하려고 왔으니까요, 전.“
빅시온력으로 V25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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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 등장하는 지명과 이름 등은 주제에 맞게 모두 상상 속의 이야기로, 실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약한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날짜의 이동이 많습니다. 날짜에 유의하여 읽어주세요!
*추천 브금이 있습니다! 플레이리스트에 순서대로 담아 놓으시고 표시가 나올 때마다 재생시켜 들어주시면 훨씬 생생하게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LIST------------
1. The closer(inst.)
2. Mistress(intro)
3. Depend on me OR Desperate
4. 니가 없는 난(Inst.)
5. Take your hand(inst.)
6. Into the void
7. VOODOO(intro)
8. Fantasy(inst.)+Into the void
9. 차가운 밤에
10. Today
(+ 안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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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the closer(inst.)]
eorþe, 그러니까 에어드는 당시 네 속성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물(沇-연), 풀(植-식), 빛(彬-빈), 그리고 불(火-화). 각각의 구역들은 차례대로 naster(네스터), ravenica(라베니카), bintero(빈테로), kenion(케니온)이라고 불렸다. 에어드의 모든 거주민들은 태어날 때 네 속성 중 하나를 지니고 태어났고, 자신이 속한 속성의 구역으로 보내졌다.
에어드는 ‘요력(耀力-빛나는 힘)’이라는 힘으로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 생명체가 태어날 때도, 그 생명체들이 자랄 때도, 소멸할 때도 모두 요력이 필요했다. 요력이 사라지는 것은 곧 에어드의 멸망을 의미했다.
에어드의 거주민들 역시 네 부류가 있었다. 속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페어리, 제일 일반적인이콘, 마지막으로 각 구역의 결계망을 지킬 수 있는 네온들, 그리고 시제(示祭).
페어리들은 속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여서 네 구역들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들은 요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콘이나 네온들보다 크기가 작았으며 날개가 있었다. 머리색은 주로 초록색이나 노란색, 드물게 하늘색 등 자연의 색이었다. 에어드의 각 구역들은 서로 경계가 쳐져 있었는데 다른 속성을 가진 거주민이 구역의 경계를 넘어갈 경우 쉽게 열병을 앓았기 때문에 페어리들이 대신 네 구역의 교류를 도와주었다. 가끔 어떤 한 속성을 약하게 지니고 생겨난 페어리들은 해당 속성의 구역에서 네온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에어드는 페어리들이 가지고 있는 요력으로 땅이 지속되는 구조여서 페어리들이 없다면 에어드 역시 존속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에어드의 거주민들은 페어리들의 안전에도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콘들은 에어드 거주민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류로써, 에어드를 가꾸고 보존하며 생활했다. 이들 이콘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에 간단한 교육과정을 밟으면 자연물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네스터리안들은 자유자재로 비를 내릴 수 있었고 그 능력으로 단번에 초목에 물을 주거나 바닷속의 조개를 마음대로 줍곤 했다. 라베니칸들은 풀을 빨리 자라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라베니카에는 많은 숲이 있었고 그 안에는 온갖 과일들이 사시사철 멈추지 않고 열려 있었다. 빈테리안들은 원하는 곳을 밝게 비출 수 있어 탐험에 능했으며, 밤낮을 조절할 수 있었다. 케니온의 거주민들은 불을 이용해 손쉽게 빵을 구울 수 있었고, 케니온에서만 나는 약초인 메디카를 빠른 속도로 자라게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온들.
이들은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보조개나 점과 같은 특이한 심볼을 지녔고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가졌으며, 그 수가 극히 적었다. 네온들은 일반적인 이콘들보다 50배는 강한 속성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고, 일단 네온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시제에게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주 어린 나이부터 구역의 결계망을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에어드에는 요력의 근원이자 에어드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시제(示祭)라는 존재가 있었다. 이들은 외부적인 압력이 없는 이상 죽지 않았다. 1000년, 2000년 또는 그 이상을 살기도 했다. 한 시제가 소멸하면 그 해의 달력도 바뀌었다. 운(運)을 타고난 시제는 미래를 감지할 수 있었고, 원(元)을 타고난 시제는 마음을 읽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학(學)을 타고난 시제는 모든 것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에어드 외부는 에어드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기 때문에 에어드에게 이 결계망을 세우고 지속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에어드의 외부에는 제피스라고 불리는 생물체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외관이 굉장히 다양했고 성격 또한 포악하여 네온들 최고의 골칫덩이었다. 이 검은 존재들은 요력을 먹고 살았는데 그만큼 페어리들을 굉장히 좋아해서, 에어드의 경계로 페어리들을 홀려 그들의 요력을 흡수하며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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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3년 11월 13일, 빈테로]
“잠깐만 이쪽으로.”
“무슨 일이시죠?”
“아들이 네온으로 확인이 되었죠?
“네, 그런데요..”
“빈테리안이고요?”
“네, 빈테리안이에요.”
“..알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아기를 보는 엄마의 모습이 착잡했다. 아기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긴걸까.
네온의 자리가 꽤나 힘든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기가 네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니 그 전에 태어난 아이의 보조개를 봤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길 바랬다. 네온이 되어 신전에 들어가면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걱정이 없게 될지 몰라도 에어드를 위해 그 외의 모든 걸 희생해야 했기에.
아기는 아직 말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안겨있는 아기가 깊은 보조개를 집어넣으며 백옥같이 웃어보였다. 동시에 아기의 엄마는 쓴 웃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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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4년 1월 9일, 빈테로]
“내일 아침 6시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드디어 내일 아기가 신전으로 가 네온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네온으로 선택을 받은 아이는 이제부터 신전 안에서 밖에 생활 할 수 없는데, 우리 빈아.
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후에는 자신이 가진 속성의 힘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았지만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넘치는 힘을 담아낼 수 없어서 자기 멋대로 힘이 발현되어 주변물건들을 부수거나, 태우거나, 쓸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열병을 앓기도 했다. 그래서 네온으로 확인이 되어 신전으로 불려온 아이들은 자신의 힘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 바깥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신전은 결계막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네온들이 신전에서 너무 많이 떨어져 버리면 결계가 느슨해져버리므로 멀리 나갈 수는 없었다.
“이 아이인가요.”
“보조개가 아주 예쁜 아이네요.”
“이 아이는 심볼이 보조개군요.”
저 말을 듣는 엄마의 기분을 저 페어리는 모를 것이다, 절대.
“잘.. 부탁드려요, 시제님.”
“모두 에어드를 위한 것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잘 해낼 겁니다, 이 아이.”
노란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시제가 아이를 한 번, 아이의 엄마를 한 번 쳐다 보았다. 시제에게 이 장면은 익숙하다. 스스로도 잔인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에어드의 존속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운(運)’을 담당하는 이 시제는 미래의 일을 감지했다. 곧 에어드가 크게 혼란에 빠진다. 사실 네온들에게도, 이콘들에게도, 외부의 페어리들에게도 아직 이 소식을 말하지 못했다. 다만 몇몇의 결계주변을 이동했던 페어리들이 요즘 제피스들이 조용한 것에 약간 의문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전까지 얼른 예언의 대상을 찾아내야만 한다. 잔인하지만 그게 이 아이이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BGM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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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8년, 케니온]
“야! 그거 내꺼거든! 내가 찾은거야!”
“형아가 찾았어두 내가 먼저 뽑았으면 내꺼지!”
“너 진짜 너무하다! 넌 전말 전말 마니 나쁜 애야!”
6살쯤 되어보이는 아이의 눈에서 살짝 불꽃이 일자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어른이 눈치를 보며 달려와 얼른 아이의 눈을 감겼다.
“켄, 엄마가 주의하라고 했지.”
“쟤가 내가 찾은 메디카를 훔쳤잖아요!”
“눈.”
“힝.. 알겠어요..”
뾰족한 귀를 가진 켄이 금세 울상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옆에서 켄의 메디카를 대신 뽑아버린 아이가 켄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형아, 미아내. 이거는 형아 가져. 형아 눈에서 불 이렇게 후루룩 나며는, 엄마가 엄청 놀라자나. 그러니까 형아두 눈으루 화 내면은 안돼, 알겠지?”
켄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아이가 오히려 짐짓 어른인 체 하며 켄에게 한 마디 했다. 아직은 어려 단순한 켄이 한손으로는 눈물을 닦으며 아이가 내민 메디카를 쥐었다.
“너는 그래두 아직 마니 나쁜 애 아니야, 조금 나쁜 애야.”
켄이 뾰족한 귀를 쫑긋 거렸다. 켄의 엄마는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켄을 바라봤다.
둘이 붙어 있으면 유독 더 심한 켄의 불꽃이 심히 염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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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9년, 케니온]
“혀가, 혀가! 일어나바! 일어나 일어나!”
“우웅.. 형아 또 뭐 찾아써?”
“이거봐! 왕따시만한 메디카야! 엄청 커! 내가 본 것중에 제일 커!”
“오잉? 우아! 형아 짱이다! 이거 어디서 찾아써? 나두, 나두 갈래!”
“쉿, 사실 나 이거 죠오기 빈테로 경계 주변에서 찾아써.”
“형아 거기 갔는데 괜차나써? 엄마가 경계주변에 가지 말라고 했자나. 경계 주변에 가면 머리 아뜨뜨 한다고 했자나.”
“아니야, 나눈 괜차나써! 우리 또 가자, 또 가자!”
“잠깜만 기다료바!”
아이들이 죽고 못사는 이 메디카는 오직 더운 곳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케니온에서만 채집이 가능했다. 주로 열을 내리는 약초로 쓰이지만 그 꽃이 달달해 어린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예쁜 채집가방을 들고 메디카를 찾으러 다니는 일은 아이들에게 썩 멋진 일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작당모의 중인 이 아이들은 8살, 그리고 5살. 한참 호기심 많을 때인 이 말썽꾸러기들은 오늘도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하는 중이었다.
“혀가, 저기 있다. 저기!”
“가보자, 가보자!”
쑤욱-
“헉, 이게 뭐야?!”
“메디카가 엄청 커졌어..!”
빈테로의 경계에 있던 두 송이의 메디카가 아이들이 다가가자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아이들이 매우 신기해 하며 땅을 파던 중, 빈테로 경계를 지나던 한 페어리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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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9년, 신전]
“아이가 빛을 꽤 잘 다루네요, 원래 이렇게 타고난 것 같아요. 아직 태어난 지 6년도 채 안됐는데, 빛이 아이 주변에만 잘 모여있어요.”
그 말을 들은 시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라비는? 빈이와 나이가 똑같은가 비슷한 그 아이.”
“아, 라비요. 그 아이는 아직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 네온들과 똑같이요. 그리고 라베니칸은 아직 한 명이 더 있어서 괜찮습니다. 천천히 더 배우면 될 것 같아요, 그보다 지금 불 속성이..”
현재 신전에는 총 6명의 네온들이 있었다.
네스터에서 세 명, 라베니카에서 두 명, 그리고 빈테로에서 한 명.
원래라면 네 속성들의 네온들이 함께 결계막을 유지해야 하지만, 웬일인지 요즘 케니온에서 네온을 발견하지 못해서 불 속성이 약했다. 결계막은 총 두 겹, 서로 도움을 주는 속성끼리 뭉쳐 만들어졌다. 하나는 물과 풀 속성인 네스터리안과 라베니칸 둘이 페어로, 다른 하나는 불과 빛 속성인 빈테리안과 케니오니안이 페어로 만들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 속성이 공석이 되어버린 지금, 결계는 꽤 약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피스들이 언제 어디서 페어리들을 흡수할지 모른다. 빈테로의 아이, 빈이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시제가 날카로운 얼굴을 더 구겼다.
어떡해야 하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에어드가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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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0년, 신전]
불 속성의 결계가 비어있지만 빈이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능숙하게 잘 해주고 있다. 저렇게 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결계가 비거나 약한 곳 없이 고르게 잘 만들어져있다. 저정도 결계를 혼자 만드는 데 체력이나 속성의 힘을 조절하는 게 여지껏 있어왔던 네온들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이야 에어드에 별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빈이는 아직 어리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일게 뻔하다. 이러다 무슨 일이 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인데. 역시 약속을 지키기는 힘든건가.
그 때 한 금발의 페어리가 시제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시제님. 케니온에서 네온과 비슷해보이는 힘을 가진 아이를 둘 봤어요. 혹시 네온이 아닐까요?”
시제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귀가 뾰족한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선은 참아야 했다. 몰랐던 것처럼 있어야 했다.
“혹시 어디쯤인지.”
“에어드 경계 가까이 있는 쪽이에요. 빈테로와 바로 맞닿아 있는 곳이요.”
이런,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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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mistress(intro)]
샤락-
시제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저 위 쪽의 종이를 한 장 꺼내들었다.
[불(火)이 있는(在) 곳에 빛(彬)이 있는 법입니다. 불이 없이는 빛도 있을 수 없지요.
불이 모여야 비로소 빛이 넓게(弘) 퍼질 것입니다.
달(月)과 해(日)를 뒤집은 날, 그리고 달과 해를 한 번 이긴 날, 그 날을 기억하세요.
그 날이 불과 빛이 서로(相) 힘을 내는 날이 될 것입니다.]
시제는 양피지에 휘갈겨 적혀진 글씨를 한 번 따라 읽었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예언가가 빅시온력으로 약 2000년 전, 그러니까 V524년에 ‘운’에게 알려준 예언이었다. 그때는 에어드가 상당히 평화로웠고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어드에 혼란이 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시대에 이 예언가는 언젠가 에어드에 혼란이 올 것임을 예언했고, 그러면서 꼭 기억하라며 ‘운’에게 이 말을 해주었다.
곧 혼란이 올 것임을 예감한 시제는 이제야 비로소 이 말이 어떤 말인지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불 속성과 빛 속성을 지닌 네온들이 그 혼란의 날에도 모종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 때처럼.
예언가가 자연으로 돌아간 후(에어드에서는 생명체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 초목을 피운다), 언제부턴가 제피스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그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그들의 포악함이 에어드의 안전을 크게 위협해오기 시작했다.
*re [BGM-Mistress(Intro)]
V1300년, 강해진 제피스들이 에어드에 쳐들어 온 적이 있었다. 그 날 따라 유독 제피스들이 조용했던 날이었다. 바깥을 보다 이상함을 느낀 시제가 몇몇의 페어리들을 보냈지만, 그 페어리들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 전까지 제피스들은 요력을 흡수하기 위해 페어리들을 잡아먹진 않았다. 에어드 외부에도 충분히 많은 방법들과 자원들이 있었기에 제피스들이 굳이 에어드의 페어리들을 홀려 잡아먹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제피스들이 더욱 다양한 형태로 변해 에어드를 위협했고, 전례없었던 사건에 에어드의 거주민들이 우왕좌왕했다.
그 때, 한 빈테로의 네온이 제피스가 어두운 곳으로부터 몸을 바꿔오는 걸 발견했고, 그를 포함한 세명의 네온들은 제피스들의 구역에서 어둠을 없애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케니오니안들 역시 메디카를 열심히 실어 날랐고 그 결과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어드의 피해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 중 절반에 가까운 수의 페어리들이 사라졌고, 제피스들에게 빛을 비추던 3명의 네온 중 속성의 힘을 다한 두 명이 연이어 소멸했다. 에어드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페어리의 수가 크게 줄어든 후 시제는 각 구역에서 네온들을 모아 결계를 세우도록 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제일 안정적인 물-풀, 불-빛의 조합을 알아냈고 그 방식은 지금껏 유지되어 왔다. 각 네온들의 힘에 따라 결계의 강도 역시 달라졌기 때문에 네온들을 가르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네온들의 자유 역시 점점 줄어갔는데, 결계의 시작인 신전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결계의 강도에 큰 영향을 미쳐 네온들이 신전 밖으로 멀리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계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체력소모가 매우 큰 일이어서, 네온들의 수명 역시 일반적인 이콘들의 수명에 비해 3배 정도로 상당히 짧았다.
더군다나 신전은 네 가지 속성이 잔뜩 뭉쳐있는 곳이어서 이콘들은 접근이 힘들었다. 무속성인 시제와 속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페어리, 그리고 네온들만이 신전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네온들은 네온들끼리 신전에서 자라갔고, 자유가 없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 힘든 일이었기에 자신의 가족이 네온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이콘들은 크게 슬퍼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시제 역시 신전에 네온들을 최소한으로 두려고 했었다. 속성이 뛰어난 네온들만 최소한으로 두고, 에어드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데려오려고 했다. 굳이 많은 네온들을 두지 말자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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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2년 4월 6일.
신전에는 어느정도 나이가 된 네온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에어드 경계에는 잘 훈련받은 이콘들이 간간히 결계를 치려드는 제피스들을 처리하며 페어리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비록 나이가 많은 네온들이었지만 신전에 있는 그들만으로 결계망은 잘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제는 굳이 더 많은 네온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바로 그 날, 케니온에서는 한 작은 네온이 태어났다.
“이게.. 지금.. 귀가 뾰족하고.. 혹시 네온..인가?”
“안 돼, 우리 아이를 신전에 보낼 수는 없어요. 어떻게든 알리지 말아야 해. 여기에 메디카가 많으니까 열병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거야. 우리애 만큼은 안 돼..”
그 뾰족한 귀의 네온을 부모는 케니온의 앞 세글자를 따 켄이라고 불렀다. 가끔은 애칭으로 환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이가 네온으로서 신전에 들어가면 부모조차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어렸을 때 신전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부모의 개념조차 잊는다고 했다. 내 아이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
켄의 부모는 아이의 존재를 숨기기로 결정했다. 네온이란 것을 들키지 않게끔 철저히 교육시켰다. 네온이라 그런건지는 잘 몰랐지만 아이의 눈에서 가끔 불꽃이 튀어서 그럴 때마다 주의에 주의를 주었고, 불을 만드는 법도 아주 자세히 가르쳤다.
“켄아, 눈에서 불꽃이 나려고 하면 얼른 눈을 감고 셋을 세자 알겠지? 눈에서 불꽃이 나는 건 아주 위험한거야.”
“눈에서 하르르! 아주 이험한거지!”
“맞아, 우리 아들 똑똑하네. 그러면 아들, 이건 뭔지 알아?”
“이거능 그거야! 먹으면 아이 좋아 하능거!”
“아이구 똑똑해. 켄이 놀다가 몸에서 열이 나려고 하면 이거 찾아서 먹으면 돼, 알겠지?”
“몸이 아뜨 하면 케니 이거 머글게!”
“잘했어, 밥먹자 손씻고 올래?”
주변에 네온을 가진 부모가 없었고 세간에 떠돌던 네온에 대한 이야기들 역시 딱히 신빙성이 없는지라, 네온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켄의 부모는 원래 모든 네온이 다 그런 줄 알고 켄을 키웠다. 켄 때문에 집 주변의 메디카가 매우 잘 자란다는 것도 모르고.
역시 시제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유독 한 지역에서만 쑥쑥자라는 메디카를 보며 시제는 저기에 무엇인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속성이 좀 센 이콘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저정도로 자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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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가 그 구역에 의문을 가질 그 때쯤, 아니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시제의 방 앞쪽에 있는 작은 뜰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은 가까운 곳의 불을 모두 삼키는 듯 점점 밝아졌다. 저게 네온이 생긴다는 신호임을 단박에 눈치챈 시제는 일단 그 불빛을 방으로 끌어올렸다.
“..세상에..”
네온은 일반적으로 이콘들으로부터 태어나지만 이렇게 어디선가 기운을 모아 생겨나기도 했다. 물론 후자의 경우 극히 드물어, 에어드 역사에 딱 한 번 기록되어 있었다.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 이전에 이 불빛을 마주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그때도..
시제는 네온이 잘 생겨나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흔하지 않은 경우인 만큼 어떻게든 탄생을 성공시켜야 했다. 혹시 이 아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자꾸만 식는 온도에, 자꾸만 사라지는 빛. 무속성인 시제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필 신전 앞마당에서 시작해서는. 그 순간 번뜩, 케니온의 그 구역이 생각났다. 시제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조심스럽게 불빛을 안았다. 그리곤 케니온의 그 구역으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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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님..?”
망토를 벗은 금발의 남자가 시제임을 알아챈 켄의 엄마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녀는 얼른 치마 끄트머리를 잡고 똘망하게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던 켄의 눈을 가린 뒤 등 뒤로 숨겼다.
“그 아이가 네온이 맞습니까.”
“아니, 그게, 저..”
“아이를 데려가려 온 것이 아닙니다. 부탁 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생각 외의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제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불빛을 꺼내놨다.
“이게 뭔가요?”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이콘으로부터가 아닌 곳에서 네온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불빛처럼요.”
“이게.. 네온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제가 노력해 봤지만 무속성인 저에겐 역부족이더군요. 집 주변에 자라나는 메디카를 봤습니다. 그 정도의 속성이면 틀림없이 불빛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와 불빛이 함께 자라게 도와주십시오. 아이의 존재를 알리지 않겠습니다.”
“……약속을 지켜주세요.. 아이가 그 안에서 부모조차 잊은 채 자라는 걸 원치 않습니다.”
“약속합니다, 부인. 부탁드리겠습니다.”
V2495년 7월 5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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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Depend on me OR Desperate]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불빛을 자라게 하기 위해 자신의 조각 일부를 써버린 시제는 며칠간 피곤에 시달려야 했다. 시제는 모든 속성을 담은 세 개의 조각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조각들이 시제의 감을 움직이게 했고, 시제가 시제의 능력을 지니게 했다. 이 세 개의 조각들은 곧 시제 그 자체였다.
시제 ‘운’ 역시 그랬다. 그 역시 처음엔 3개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이미 두 조각을 써버렸다. 하나는 얼마 전 V2495년 7월 5일, 다른 하나는 1110년 전인 V1385년 4월.. 6일.
그 때와 소름끼치게 똑같은 상황.
그 날이 떠오르자 사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에 벌레가 타고 기어올라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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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300년,
제피스들이 무자비하게 에어드를 침범했고, 페어리의 수는 점점 줄어갔고, 소멸한 페어리들 때문에 에어드의 경계에는 무성한 초목이 자리잡았다. 빈테리안 네온들과 이콘들은 열심히 빛을 유지했고, 케니오니안들은 열심히 메디카를 키워 날랐고, 라베니칸들은 페어리들의 잔재들을 거두어 다른 숲에 옮겼고, 네스터리안들은 비를 만들어 그들을 기렸다. 계속되는 페어리들의 소멸로 요력이 점점 줄어든 에어드는 곧바로 요력의 근원인 시제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와중에 3명의 빈테리안 네온들 중 한 명이 소멸했고, 에어드는 점점 더 크게 흔들렸다.
요력이 줄어든 탓에 찾아온 큰 어지러움에 시제는 비틀거리며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 에어드를 바라봤다. 정녕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는가. 그 예언가라도 있었으면 좀 더 나았으려나. 시제로써의 능력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그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 갑자기 불빛이 반짝였다. 그 불빛은 주변의 모든 빛을 삼켰다. 저런 경우가 역사에 딱 한 번 기록되어있다. 네온이 태어나는 순간. 저 모양새는 빛 속성이다. 아니, 불 속성인가?
시제는 네온을 탄생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럴 때 해당속성의 네온이 있다면 좀 더 수월했겠지만 지금 에어드는 그럴 새가 없었다. 시제는 자신의 조각을 하나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요력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조각을 꺼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네온을 탄생시켜야 했다. 숨이 막히고 손이 덜덜 떨렸다. 입에서는 피가 투둑, 흘렀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팟-
시제의 방에 갑자기 큰 빛이 일더니 일순간 불빛이 방을 삼켰다. 불빛에 의해 우수수 떨어지는 책들을 보며 시제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섬짓,
알 수 없는 느낌에 시제가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불빛은 사라졌다.
네온, 네온은?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시제의 눈이 한 곳에 머물렀다.
저게.. 네온?
그 곳에는 아주 작은 생물체가 가만히 앉아서 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시제의 손바닥 두 세개 크기 정도 되어보였다.
머리 위에서는 불인지 빛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생명체는 파닥거리며 날아서는 앉아있는 시제의 손 위에 가만히 앉았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네온이었다. 그러나 크기를 보자니 네온보다는 오히려 페어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머리색도 검었고, 날개가 있으나 페어리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고 불 속성인지 빛 속성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미지의 생명체가 어떠한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만은 확실했다. 크게 줄어든 요력에 휘청했던 정신이 이 생명체가 손에 닿자 곧바로 완화되었다. 생긴건 확실히 네온같이 생겼는데 말이지. 심볼은 눈썹 위의 큰 점인 듯 했다. 덕분에 시제는 빠른 속도로 정신을 차렸고 에어드의 요력을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게 잘 가두어 놓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V1385년 4월 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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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는 그 생명체를 얼마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반적인 네온과는 다르게 열병을 앓지도 않았다. 나처럼 무속성이면 몰라도 두 개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건가, 싶었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 존재가 에어드를 구해줄 수 있을까.
아무튼 여유를 부릴 새는 없었고, 시제는 얼른 무언가를 해야했다. 시제는 이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빈테로로 향했다.
신전에서도 봤지만 가까이서 본 빈테로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유일한 빈테리안의 두 네온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빛을 냈고, 몸에서는 거의 솟아오를 정도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케니온과 빈테로의 경계에서는 이콘들과 페어리들이 목숨을 걸고 메디카를 날랐다. 동시에 경계에서는 초목이 계속해서 자라났다가 뽑혔다가 했다.
두 속성을 함께 가진 이 아이가 어떻게 할까.
사실 아직 태어난 지 몇 달이 채 안 지난 이 조그만 생명체에게 에어드의 존속을 부탁한다는 것이 참으로 잔인했다. 자식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시제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그 생명체를 꺼내놨다. 눈앞의 상황에 아이는 겁을 먹은 듯 했다. 제피스들의 괴상한 소리와 네온이 빛을 내는 소리,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페어리들과 이콘들의 모습과 비명. 시제에게도 힘든 이 상황이 이 조그만 아이에게는 어떨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는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그 때 한마리의 거대한 제피스가 땅을 울렸고, 두 명의 네온 중 한 명의 네온이 끔찍한 모습으로 소멸하여 잎도 없는 마른나무로 변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시제가 행동을 해야만 했다.
아이에 대한 정 보다는 에어드가 우선이었다.
시제는 겁에 질려 떠는 아이를 요력으로 후-불어 무작정 경계로 보내버렸다. 역시 특별한 존재였던건지 아이는 위험을 감지한 즉시 불인지 빛인지 모를 무언가를 뿜어냈다. 그 안에서 조그만 아이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었다. 불빛을 뿜어내는 게 많이 버거워 보였다. 나이가 있는 네온들도 저렇게 힘든데 저 조그마한 아이는 오죽할까 싶었다. 몸이 사시나무 떨듯 바리작거렸고 가지고 있던 날개도 떨어졌다. 몸이 점점 뜨거워 지는 건지 울그락 불그락했다. 제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로인해 어느정도 수가 줄어든 제피스들이 약 100년만에 다시 어둠안으로 몸을 숨겼고, 남아있던 한 명의 빈테리안 네온은 즉시 힘을 제어하며 회복했다. 하지만, 아직 어렸던 그 조그마한 생명체는 계속 빛나다가 결국 다른 빈테리온과 같이 차마 보기 힘든 모습으로 소멸했고, 그 자리에는 한 송이의 라벤더가 피었다.
1385년 7월 5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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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496년]
시제는 1110년만에 자신의 뜰 안에 다시 나타난 그 불빛에게 그 때처럼 다시 제 조각을 뽑아주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보다는 평온한 에어드의 상태와, 그 아이를 도와줄 이콘이 있었다는 것.
방금 시제는 다시 케니온의 그 집으로 가 아이를 확인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 집의 부인은 그 아이를 혁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했다. 호칭을 고민하다 켄과 함께 형제처럼 자란다면 켄에게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 엄마아빠라고 부르라고 하기로 결정했다고도 했다. 혁을 본 시제는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눈썹 위의 점과 옅게 접히는 눈 까지 너무 그 때 그 아이와 똑같다.
사실 시제는 신전에 혁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혁의 존재를 알리면 당장에 신전으로 데려와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시제가 감지한 얼마 뒤에 닥칠 혼란에 또 다시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모습의 아이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미래에 일어날 그 큰 혼란에 에어드를 구할만한 힘을 가진, 예언가가 예언했던 그 아이가 이 아이가 아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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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1년]
[BGM-니가 없는 난(inst.)]
“시제님, 결정을 내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항상 에어드를 우선시 하시던 분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켄과 혁의 존재가 신전에 알려진 후, 시제는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이제는 정말 불속성의 네온이 필요했다.
시제는 어쩔 수 없이 케니온의 그 집으로 향했다.
“네?“
“죄송합니다. 에어드를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약속..하셨잖아요.. 아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케니오니안 네온이 그 뒤로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결계가 많이 약합니다. 이대로라면 에어드가 크게 위험합니다.”
“엄마, 왜 그래요?”
이제 막 9살이 된 켄이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헉, 시제님이세요? 안녕하세요! 우와 저 시제님 첨 보는 거 같은데! 어.. 아닌가? 저는 켄이라구 해요! 아 참 그리고 9살이에요!”
“켄!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
켄이 시제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사실은 모두 들었다. 엄마가 방에 들어가 있으라 했지만 호기심 많은 켄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엄마 몰래 방문을 열고 나온 켄은 자신이 네온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네온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다. 이콘 중 선택을 받아 에어드를 지키는... 뭔가 미지의 존재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게 나라고? 그런데 왜 엄마가 저렇게 질색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멋있는 거 아닌가? 나두 멋있는 거 하고싶은데..
시제가 돌아간 후, 켄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네온이 나쁜 거에요?”
잠깐의 정적 후, 엄마는 대답했다.
“아니.. 나쁜 건 아니지만, 켄아. 항상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거란다. 네온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야. 에어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게 주변사람들을 아프게 할 수도 있어서, 엄마는 우리 환이를 보내고 싶지 않아.”
“주변사람들을 왜 아프게 하는데? 희생이 뭔데?”
켄의 엄마는 그 말에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유가 없이, 평생 결계를 만들다 빨리 소멸하게 되는 게 희생이라는 말을 이 아이에게 어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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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아, 내가 네온이래.”
“네온? 그거 언청 쎈거잖아.”
“응, 나는 짱 쎄서, 그래서 내가 희생을 하면은, 에어드를 지킬 수 있대. 그럴라면 죠오기 신전으로 가서 살아야 된대. 근데 그러면 우리 혁이도 아빠도 엄마도 못보겠지?”
“거기 가면 형아 나랑 못놀아 이제? 나랑 메디카도 못 찾으러 다니구 동그리 굴리는 것두 못하구 나무집에도 못 올라가?”
“아마두? 그게 희생이라는 건가바. 소중한 거를 지킬라며는 희생을 해야한대, 엄마가. 근데 나한테는 혁이랑 엄마랑 아빠랑 너무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가야하지 않을까?”
겉으로는 철부지 말썽꾸러기에 어려보이지만 사실 켄은 속이 상당히 깊은 아이였다. 거기에 가면 이제는 혁이랑도 못 놀고 어쩌면 부모님도 자주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켄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꼭 가야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왜인지 모르게,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엄마, 나 시제님 따라가면 안 돼?”
“환아..”
그 말을 들은 엄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켄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할까.
사실 시제님이 9년 동안 모른 척 해주신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긴 했다. 이대로 계속 아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신전으로 가야겠지, 그게 운명이니까, 하고 생각하며 지냈었다. 시제가 와서 혁이 아닌 켄을 지목해 데려간 것도 다 운명이겠거니 여기면서 순응했다. 다만 생각보다 시기가 빨라서 당황했을 뿐이었다.
“환아, 거기 가면 엄마도 자주 못보고 아빠도 자주 못 보고 혁이도 자주 못 볼 수도 있는데, 괜찮아?”
“응, 괜찮아! 소중한 거 지킬 수 있다매! 켄이는 엄마랑 아빠랑 혁이랑 다 사랑하고 소중하니까!”
켄의 눈에서 화륵 불꽃이 일었다.
엄마는 애써 웃음지으며 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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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아, 잘 할 수 있겠지?“
“응, 나 잘 할 수 있어!”
“형아아..”
혁이 방 안의 물건들을 이것저것 가방에 넣고 있는 켄을 울먹이며 불렀다.
순하게 쳐진 눈이 더 애처로워 보였다. 마치 물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혁아 울지 마, 형아는 짱 쎄서 괜찮아. 이거바, 형아 알통도 있자나! 아참, 이거 형아가 아끼는 반지인데 이거 줄게! 형아랑 똑같은거야. 혁이 형아 보고싶으면 요기 반지에다가 말하면은 형아가 다 들을 수 있어!”
“훌쩍, 진짜아?”
“응, 진짜!”
“형아, 이제 나 보러 안 올거야?”
“아니야, 형아 혁이 보러 올거야!”
“진짜.. 진짜지? 형아 나 다섯밤.. 아니 열 밤 셀테니까 딱 열 밤 지나면 와야대..?”
작은 자신의 손가락을 다섯 개 펴보였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두 손을 모두 펼쳐보인 혁의 눈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있었다.
“알았어, 열 밤!”
이미 팔 길이를 한참 뛰어넘은 옷소매로 혁의 눈물을 톡톡, 야무지게 닦아준 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우리 약속할까, 약속?”
둘은 종이를 한 장 가져와 삐뚤빼뚤한 글씨로 각자의 이름을 썼다.
‘나 케니는 꼭 열 밤후에 다시 혀기랑 만남미다. 그리고 가치 동그리를 굴리꺼임미다. 매디카도 따거 임미다. 별이도 같이 만나러 갈 거임미다. 약속.’
‘나 혀기는 안 우르고 기다림미다! 케니혀아!’
“혀아가 아니라 형아라고 써야지! 형아는 하나두 안 틀리게 썼자나, 으휴.”
그리고는 혁의 글씨위에 줄을 긋고 형아라고 고쳤다.
“나는 노란색물감으로 찍을 건데 혀기는?”
“나능 보라색!”
각자 좋아하는 색의 물감을 골라 조그마한 손으로 지장까지 찍었다.
그렇게 두 장의 서약서를 만든 둘의 얼굴엔 다시 웃음이 스며들었다.
“환아, 밥 잘 먹고 시제님 말 잘 듣고.”
“응, 엄마아빠 나 잘 할 수 있어, 걱정하지마! 사랑해!”
신전으로 가기 전, 켄은 자신의 곰돌이 가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채집 가방, 병아리 장난감, 혁이랑 똑같은 반지, 엄마가 만들어 준 도넛무늬 티셔츠, 아빠가 만들어 준 강아지 피규어, 그 다음에 그림노트랑 제일 아끼는 흰둥이 색연필, 그리고.. 혁이랑 약속한 서약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꼭.. 그 때.. 우리 환이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노력하겠습니다.”
“시제님, 저는 이제 가두 대요! 엄마 안녕! 아빠 안녕! 혁이두 잘 있어!”
차례대로 이마에 쪽쪽쪽 뽀뽀인사를 마친 켄은 귀엽게 손을 한 번 흔들고 씩씩하게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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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1년, 신전]
“안녕! 안녕! 난 켄이야! 그리구 아홉 살이야!”
사교성 좋고 발랄한 켄은 곧 빠르게 신전에서의 생활에 적응했다.
연습일 뿐이었지만 결계를 치는 것 또한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뚝딱 해냈다. 신전의 페어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아이가 영특한건가, 타고난 건가..”
시제만이 그런 켄을 보며 웃을 수 없었다.
“그러면 내가 한 살 형아네? 켄 형아!”
”응, 그러네.”
“너는 이름이 뭐야?”
“빈.”
이미 다른 네스터의 엔, 라베니카의 라비 등의 네온들과 통성명을 마친 켄은 주위를 둘러보다 신전 내의 탁자에서 조용히 포도를 먹고있던 아이에게 다가가 나이를 물었다.
본인이 형이란 걸 알게되어 상당히 기쁜 눈치였다. 반면 포도를 먹던 빈은 심드렁해 보였다. 말 못할 때부터 신전에서 자라서 그런건지 원래 성격이 시크한건지 빈은 시종일관 켄의 대답에 무뚝뚝하게 일관했다.
물론 친화력도 뛰어나고 적응도 빠른 켄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어쨌든 한 명의 어린 아이였기에 신전에서의 생활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밖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살다가 신전으로 들어온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신전 내에도 정원과 연못들이 있긴 했으나 실제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작은 환경에 좀이 쑤시는 켄이었다.
결계를 치는 일도 그랬다. 신전 곳곳에는 결계를 놓는 구슬이 있었는데, 플라즈마 비슷하게 생긴 그 구슬 주변에 다가가면 결계가 강화되는 식이었다. 구슬에 가까이 다가가면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가끔 어지럽기까지 했기 때문에 무언가를 먹어줘야 했다. 물론 그 전에도 군것질을 무척 좋아하던 켄이었지만, 돌아다니는 것 만으로 힘이 쭉쭉 빠져나가니 군것질이 더 늘어버렸다. 정말 녹록치 않은 생활이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지만.
참, 그리고 시크한 저 아이도 어렵고, 풀에 스치고 베이며 산을 돌아다닐 수도 없고.
‘밖에서 놀고 싶다.. 혁이는 잘 있을까, 나없다고 울지는 않겠지, 나 없으면 누가 혁이랑 메디카따러 다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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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너.. 아니 형.”
“어엉?”
처음으로 빈이 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늘 켄이 먼저 다가가야 대답해주던 빈이었기에 켄은 적잖이 놀랐다.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는 듯 했다.
빈은 잠시 머뭇하더니 곧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형은 왜 지금 왔어?”
“나는.. 나는 내가 네온인지 몰랐어. 시제님이 안 데리러 왔어.”
“그렇구나, 그럼 형은 형 엄마아빠 얼굴도 알겠네?”
“응! 알지! 우리 엄마아빠 왕 멋져! 빵도 엄청 빨리 구워주구 내가 말 잘들으면 쪼꼬도 뿌려줘! 너는?”
“나는 우리 엄마아빠 몰라. 내가 두살도 안돼서 여기 왔대.“
“헉, 진짜?”
“응, 그래서 엄마아빠얼굴 몰라, 한 번도 본 적 없어.”
“너가 무지무지 잘생겼으니까 빈이 엄마아빠두 엄청 멋질거야!”
“진짜?”
“응! 나도 엄마닮아서 이렇게 잘생긴거야!”
켄이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턱 밑에 갖다댄 후 윙크했다. 빈이가 꺄르르 웃자 예쁜 보조개가 접혔다.
“형 그러면 밖에서 뭐가 재밌는 지도 알겠네?”
“당연히 알지! 잠깐만 기다려봐!”
켄은 엉덩이를 흔들며 우다다 달려서 신전에 올 때 들고왔던 자신의 곰돌이 가방을 꺼내왔다.
“이거는 우리 아빠가 만들어 준 피규어야, 완전 멋지지? 케니온에서만 나는 나무로 만든거야!”
“우와, 짱이다!”
“이거는 내가 우리집 뒤에 숲에서 본 말이랑 다람쥐랑 잠자리랑 매미랑 나비랑 그린거야!”
“이거 형아가 그린거야? 완전 잘 그렸다! 근데 다람쥐가 뭐야?”
“다람쥐 있잖아, 다람쥐! 꼬리 완전 큰 쥐! 도토리 뇸뇸 까먹는 애!”
“나 한번도 본 적 없어.”
“헉, 진짜? 괜찮아, 그러면은 내가 많이 많이 그려줄게!”
”이건 뭐야?”
“이거는 메디카를 딸 때 쓰는 가방이야, 근데 가끔 잠자리 잡을 때도 써. 멋지지? 맨날 혁이랑 이거 들구 놀았었는데.”
“혁이?”
“응응, 내 동생이야! 엄청 잘생기구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이만큼 커!”
“우와, 형 동생도 있구나. 나도 형아나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
“나 있잖아, 내가 친 형아 해줄게!”
“진짜?”
“응응, 진짜!”
바깥 일에 대해 잘 모르는 빈에게 자신이 살던 곳, 자신이 봤던 것, 놀던 것, 먹던 것들을 열심히 설명해 준 켄은 빠른 속도로 빈과 의형제까지 맺었다. 그 뒤로 둘은 늘 붙어다니며 의지했다. 아니 어쩌면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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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2년, 신전 켄의 방]
“으으.. 머리가 깨질 거 같아..”
“형, 형 괜찮아? 뭐 먹고싶은 거 있어?”
빈은 어렸을 때 부터 신전에서 자라서 돌아다닐 때마다 빠지는 힘에 익숙해져 대처하는 게 빨랐지만, 이제 갓 6개월이 지난 켄은 그렇지 않았다. 몸이 약한 편은 절대 아니었으나 속성의 힘이 빠져 나간다는 게 꽤나 새로운 느낌이었기에 아무리 페어리들이 감탄할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 해도 익숙해지는 데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켄이 앓아누운 걸 처음 본 빈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두 아이들의 우애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특히 빈은 켄에 대한 애정이 더 깊었다. 신전내부에 또래들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열 명도 채 안되는 수였고, 결계를 같이 이루는 아이들끼리 더 친했기 때문에 불속성이 없는 상태에서 빈은 조금은 외로웠었다. 더군다나 밖에서 살다온 켄은 빈에게 말하자면 신문물 같은 존재여서 더 그랬다.
“으허흐엉, 끅, 형 죽으면 어떡해, 형 아프면 안 돼..”
“야! 내가 왜 죽ㅇ, 아야야..”
“으헝흑흑 형..!”
“아냐, 쫌 쉬면 된다니까?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 콜록콜록.”
“형아 말하지마, 끅, 더 아프잖아. 내가 쪼꼬 많이 있어, 이거 형 다 줄게, 형 얼른 나아.. 형아가 몰래 내 포도랑 체리랑 다 먹은 거, 그거도 뭐라고 안할, 끕, 게.”
“헉, 너 알고 있었어? 나 진짜 몰래 먹었는데?!”
“아냐, 형이니까, 다 괜찮아, 끅흐흑.”
빈이 울면서 한가득 갖다 놓은 포도와 체리, 초콜릿 덕분에 켄은 왠지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혁을 생각하니 또 오래 누워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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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4년, 신전]
켄이 신전에 들어온 지 몇 년이 흐르고 켄은 신전에서의 생활에, 혁은 켄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둘 모두 헤어지기 전 맞췄던 반지를 늘 끼고 다니는 것 만큼은 잊지 않았다.
“근데 형, 그게 뭔 반지야?”
“아, 이거.”
“아니, 뭐, 말하기 힘든 거면 안 말줘도 돼. 형이 긴장하거나 걱정하거나 할 때마다 만지니까 그냥.. 궁금해서.”
“아냐, 이거 나 여기 오기 전에 혁이랑 맞춘거야. 근데 습관적으로 내가 만졌나보네.”
“그 정도로 만지작 거렸으면 좀 있으면 없어지겠는데?”
“헉, 안되는데..”
그러면서 켄은 반지를 또 만지작 거렸다.
“킥킥, 저거봐라, 형 또 만진다.”
“야, 이러다 진짜 닳아서 없어지면 어떡하지?”
켄이 귀를 쫑긋거리며 울상지었다. 그러면서 혁이도 아직 안 잃어버리고 있을까, 생각하다 또 혁 생각에 높은 코가 시큰거렸다.
“아, 우리 혁이 보고싶다.”
그러면서 켄은 이제는 조금 작게 느껴지는 곰돌이 가방안에서 종이 한 장을 팔락거리며 꺼내왔다.
“이건 또 뭔데? 나 처음보는데? 뭐야, 나한테 비밀이 있었어?!”
“흐, 이거 여기 오기 전에 혁이랑 쓴거. 열 밤 자면 간다그랬는데 지금 얼마나 된거야.”
“음, 한 1186일 정도?”
“아나, 그런건 굳이 계산해 줄 필요없거든?”
많이 쓸쓸해 보이는 켄에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슬쩍 농담을 던진 빈이었다.
나는 형 덕분에 안 외로운데, 형은 아직도 외로운가보다. 나도 켄 형 없으면 혼자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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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4년]
결계가 왜 이러지. 분명 둘 다 잘하고 있는데.
“혹시 결계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불 속성과 빛 속성의 비율이 자꾸 흐트러집니다.”
“비율이 흐트러진다고요?”
“네, 두 속성이 서로 너무 강해서 충돌합니다.”
“정도가 심합니까.”
“아니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대체 이게.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두 속성이 다 강해서 결계가 흐트러진다니.
다른 속성에 비해 한 속성의 힘이 너무 강해서 흐트러진 경우는 비교적 자주 있었다. 뭐든지 조화를 이루어야 최대의 힘을 낼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페어를 이루는 두 속성중 하나가 너무 강하면 그 조화가 무너져 결계 역시 흐트러졌다. 근데 두 속성이 서로 너무 강해서 충돌한다니.
켄과 빈 모두 전무후무한 속성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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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잘 지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형아 보고싶다, 형아가 가니까 메디카도 잘 안자라. 내가 네온이었으면 잘 자랐을텐데. 아니 그 전에 네온이었으면 형아 대신 거기 갔을텐데.”
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반지를 보며 말했다.
나는 왜 네온이 아니지.
그 때쯤, 켄의 부모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시제님이 혁이를 데려올 때 네온이 태어나는 거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혁이가 네온은 아닌 것 같다. 혁이는 메디카도 자라게 할 수 없었고, 불도 잘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불 속성이 아니라기엔 케니온 경계 내에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불 속성을 가졌는데 네온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콘도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혁이가 페어리라는 가정 뿐이었는데 페어리일리가 없잖아.
“이걸 시제님께 말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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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빛속성의 결계가 자꾸 충돌하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켄과 빈 모두 전례없는 속성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건 누구 한 명이 아닌 둘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결계가 흐트러질 정도로 둘의 힘에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해야 하는 건데, 너무 이상하다.
책, 예언서, 역사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놓친 게 있나 생각해 봤으나 짚이는 건 없었다. 이천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센 네온이 두 명이나 존재했고, 둘이 만나니 결계가 흐트러진다.
둘 사이에 뭔가 더 필요한 걸까? 둘의 힘을 조화시켜 줄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시제는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케니온의 그 집에 눈길이 멈췄다.
“...? 그런데 왜 저쪽에 메디카가 잘 자라질 않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시제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혁이 살고있을 그 집주변의 메디카는 오히려 시들해 보일 정도였다. 켄이 그 집에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혁이가 네온이 아니었던가?
미래의 그 날에 그럼 혁이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건가?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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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take your hand(inst.)]
“형은 동생 안보고싶냐.”
“나? 완전 보고싶지. 이젠 얼굴도 까먹을라 그래. 혁이도 많이 컸겠지?”
켄이 뾰족한 두 귀를 쫑긋 거렸다.
“나 이제 불 완전 잘 다뤄서 혁이가 부러워할텐데. 혁이는 바보라서 이런거 못할 걸? 내가 다시 만나면 잘 알려줘야지!”
“형이?”
“반응 뭐냐.”
“장난이야. 나야 엄마아빠 얼굴도 모르지만 형은 다 보고 왔잖아. 그래서 더 보고싶지 않을까, 싶어서.”
“나 여기 왜 왔는 줄 알아?”
“시제님이 그때 불렀다며.”
“맞아, 그것도 있는데, 나 사실 엄마가 못가게 한 거였대.”
“엄마가 못가게 했다고?”
“응, 내 귀 보고 내가 네온인 거 알고나서 숨겼대. 신전으로 가면 힘들다고.”
“진짜? 그래서, 신전에서 사는 거 힘들어?”
“응, 힘들지. 결계 세우는 것 때문에 맨날 힘빠지고, 메디카도 못 뽑으러 다니고. 히히. 근데, 엄마가..”
켄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손에 늘 끼고 있는 반지를 한번 만지작 거렸다. 약간의 정적을 빈은 그냥 기다려 주었다.
“엄마가 소중한 걸 지키고 싶으면 희생을 해야 한댔어. 그게 이런거겠지, 뭐.”
“.......”
둘은 마주보고 한 번 웃었다. 그 무엇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던 그 웃음을 켄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
#
“하도 만졌더니 반지가 다 닳아가, 형. 형이 죽은 것도 아닌데 못보다니 진짜 너무해. 신전으로는 왜 편지도 못 보낸대?”
그 날은 혁이 불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온 날이었다. 물론 여전히 잘 다루지 못해 중간에 때려치고 나오는 길이지만.
왜 나는 안되는 거야. 나중에 형 만나면 보여주고 싶은데..
형이랑 있으면 메디카도 쉽게 찾고 그랬는데 그게 다 형 때문이었구나.
그래도 나랑 같이 있을 때만 메디카 엄청 커진다고, 그래서 다른 애들이랑 가는 거 재미없다고, 그랬었는데.
혁은 반지를 만지다 과거 회상도 할 겸 켄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 때 켄의 취향대로 꾸며진 방이 꽤 귀여워서 혁은 웃음을 피식 흘렸다. 저기 우리 갖고 놀던 풀색 공도 아직 있는데.
혁은 밖으로 나오다 켄의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삐뚤한 글씨로 ‘혀기란 나란’이라고 써져 있는 노란색 노트였다. 이게 뭐지?
---<혀기란 나란!>---
[V2498년]
“재미가 없써.”
“왜?”
“다른 애들이가 놀자고 해는데 혁이랑 노는 거 만큼 재미가 없써. 혁이랑 있으면은 여기로 가면은 있구 저기로 가면은 있구 여기저기 다 메디카이가 이쓰는데, 다른 애들이랑 이쓰면 안 그래.”
“혁이랑 있으면 메디카가 막 자라?”
“응, 그래서 켄이는 혁이랑만 놀거야!”
켄의 집 주변에 켄 또래의 아이들이 제법 있었으나 켄은 이상하리만치 혁과만 지냈다.
혁이랑 있어야 메디카를 찾기가 쉽다나 뭐라나.
“형아야, 나랑 동그리 굴리는 거 하자!”
“그래! 우리 동그리 굴리는 거 하자!”
언제 들고왔는지 혁이 동그란 풀색 공을 들고 켄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켄의 눈에서 불꽃이 나려다 켄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사라졌다. 혁과 있을 때만 튀는 저 불꽃.
혁이 건넨 공을 켄이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혁이 눈을 휘이 접어보이며 웃었다.
‘나는 우이 혀기가 너무너무 조치요. 혀기랑 영어니 살 거애요.’
----
“혀가.”
켄이 꽤나 진지한 얼굴로 혁이를 불렀다. 켄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있었다.
“웅, 형아.”
혁도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준비 됐지?”
“응, 나는 대써, 형.”
사각- 사각-
저녁을 먹으라고 켄과 혁을 불렀지만 방에서 나오지 않는 둘에 엄마가 켄의 방문을 열었다.
그 후 엄마는 눈앞에 있는 광경에 잠시 놀라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못 말려, 진짜.”
방 안 의자에 앉아있는 혁의 앞머리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고, 켄은 매우 만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귀를 쫑긋 거리고 있었다. 허리춤에 가위를 매단 걸로 보아 켄이 혁의 앞머리를 잘라준 듯 했다. 저 말썽꾸러기들을 어째.
‘오느은 혀기 암머리를 삭삭 해조지요. 우이 혀기는 잘새겨슴미다’
----
“케니 형아야, 이게 몬주 아라?”
“헉, 이거 혀기가 만든 거야?”
“응, 내가 케니형아야 줄라고 만드러써!”
조그만 혁의 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색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이거 삐약이야!”
까만색 저거는 눈이고, 저 튀어나온 건 삐약이 입인가보다.
“우리 혀기 완전 짱이다! 이거 어떠케 만드러써? 형아두 알려조!”
“음, 그런데 그거는 앙대야. 이거는.. 음, 비닐이야!”
“아니지 혁아, 비닐이 아니라 비밀이야.”
“마자, 비밀! 형아 똑똑이지!”
“그러면은, 형아는 똑똑이니까 형아두 알려조!”
“원래는 앙대야인데, 내가 형아 조와하니까 안 비닐할게!”
“비밀, 혁아 비밀!”
“아 마따! 안 비밀이야!”
‘<- 삐약이. 혀기가 삐약이를 만드러 조슴미다. 기여움미다. 혀기한태는 말이를 모태지만 근대 조금 응아 가타슴미다.’
----
“형아 이빠리를 왜 가져가여!”
때는 켄이 이빨을 뽑는 날.
켄도 혁도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켄은 아플 것같다며 울고 혁은 우리형 훔쳐가지 말라고 울고.
“우흐어흐으, 앙뽀으명 앙대요?”
“흐아앙, 우리형아 훔져가면 안대여, 우리형아 이빠리 왜 가져가여!”
혁이 콩알만한 손으로 이빨을 뽑아주기로 한 옆집 아저씨 무릎을 콩콩 때렸다.
“이빨 훔쳐가려는 거 아니야, 이거 뽑아서 다시 줄 거야. 근데 이거 뽑아야 더 멋지고 반짝반짝한 거 생긴다.”
“더 멍징거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멋지고 싶어하는 켄이 울음을 뚝 그치고 되물었다.
“응, 훨씬 멋지고 훨씬 반ㅉ, 쨘, 뽑았다.”
“아얏, 뽀바써여? 모야, 킁, 별루 앙 아프네!”
언제 울었냐는 듯 켄이 눈물자국 가득한 얼굴로 다시 헤헤 웃었다.
“혀가 아저씨야가 형아 이빨 훔쳐가는거 아니야, 여기 형아 이빨이다! 완전 머찌지!”
“끅, 형아, 이빠리가, 흐끅, 이거야? 허어엉, 긍데 형아 입에서 빨간 거, 빨간, 끅, 피, 피나! 우리 형아 아야야, 흑, 아야해! 형아 아야하면, 헝, 혀기두 아야야!”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 된 이빨사건이었다.
‘이빠리가 하나 업서져슴미다. 여기에 더 머진거 생긴다구 해스니 기다려야지. 나는 하나도 안 우럿는데 혀기가 마니 우러조슴미다. 혀기는 울보임미다.’
----
“혀가! 거기 조심해!”
“응, ㅎ, 아얏!”
“헉, 형아가 조심하랬잖아! 우왓!”
메디카를 따러 나갔다 돌아온 둘의 몰골이 꼭 어디 험한 음지를 다녀온 사냥꾼들 같았다.
맞춰입고 나간 둘의 노란색, 보라색 멜빵 반바지는 이미 저게 노란색인지 까만색인지 알 수 없었고, 다리에는 여기저기 나무에 긁히고 풀에 베인 상처들로 가득했다.
“어휴, 잘한다, 잘해.”
물론 이런 일은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므로 이젠 덤덤해진 엄마아빠였다.
“으앗, 살살, 아빠 살살..!”
“우리 왕자님들은 언제 클라나?”
“언제 크긴, 아직 멀었지. 둘이 둘어가서 씻고 나와, 밥먹게.”
“오늘 밥은 모에여?”
“버섯파스타!”
“으엑.. 버섯..”
‘혀기랑 산에 가다가 혀기가 다처슴미다. 혀기를 구해주다가 머지게 나도 조그미 다처슴미다. 근대 하나도 안아파. 그리고 나는 버서시가 시른데 버서시를 어더게 하면은 안 머글수 이슬가? 내이른 혀기랑 버서시를 다 따버리거 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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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밤이 온 날, 두 말썽꾸러기들은 또 사고를 치러 밖에 나갔다.
“혀가 너는 저거, 나는 저거. 알겠지?”
“웅, 형아. 나는 저거!”
집 뒤의 언덕 위, 둘은 별이 어떤 맛인지 체험해보기 위해 노란색 보라색 망토를 걸치고 날아오르려던 참이었다. 물론 곧 엄마에게 딱 걸렸지만.
“아야야, 엄마 케니 귀좀 놔조요.. 별까까보다 엄마가 만드르는 까까가 더 맛있어.. 그치, 혀가?”
“마자여, 혀기 귀 아야야!”
‘별까까를 먹는데 실패한 케니요언 혀기요언! 별님, 담애 얼릉 또 밤이가 오게 해주세요! 혀기랑 그 때는 꼭 머글 거 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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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한 장 노트를 넘겨보던 혁이 이런 일도 있었던가, 하며 켄의 글을 읽었다.
괜히 아려오는 큰 코 끝을 슥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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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Into the void]
[V2506년]
요즘 의문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빛-불의 결계는 자꾸 흔들리고,
혁이는 네온이 아닌건지,
제피스들은 또 너무 조용했다. 딱히 좋은 신호일리는 없었다. 또 어떤 식으로 변해올지 예상할 수가 없으니.
“요즘 제피스들이 꽤나 조용하죠?”
“얼마 뒤 에어드 혼란이 올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아직 결계가...!”
“맞습니다. 아직 결계가 안정되지 않았고 둘을 조화시키는 방법도 아직 미지입니다. 얼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샤락-
시제가 예언이 적힌 양피지를 꺼냈다.
“2000년 전 쯤 저와 함께한 예언가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무슨 뜻인지는 아직.”
[불(火)이 있는(在) 곳에 빛(彬)이 있는 법입니다. 불이 없이는 빛도 있을 수 없지요.
불이 모여야 비로소 빛이 넓게(弘) 퍼질 것입니다.
달(月)과 해(日)를 뒤집은 날, 그리고 달과 해를 한 번 이긴 날, 그 날을 기억하세요.
그 날이 불과 빛이 서로(相) 힘을 내는 날이 될 것입니다.]
“불과 빛이 케니오니안과 빈테리안을 가리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달과 해에 날이 들어가니까 어떤 날짜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근데 저 ‘날’이 언제인지 도통...”
“혹시 예전에 일어난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있었던 대혼란이라던지.”
예전의 대 혼란?
다시 생각해보자.
그 때와 연관이 있을까?
그 때, 그 아이가 분명 4월 6일에 태어났었다.
달과 해를 뒤집고… 이긴다…
4월 6일..
6월 4일..
한 번 이겨서..
7월 5일.
그 아이가 소멸한 날이다.
그리고….
혁이가 태어난 날이다.
시제는 다시 생각했다.
빈이 언제 태어났더라?
9월 29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7월 5일이나 4월 6일과 관련이 없다.
그럼 켄은?
“혹시 켄이 언제 태어났지요?”
“4월 6일이군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켄이 4월 6일에..
아니길 바라며 다시 확인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이건 우연이야.
우선 혁이는 네온이 아니잖아.
아니야.
쿵-
갑자기 심장이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에어드의 혼란.
“예전에 에어드에 대혼란이 있었던 적이 있지요. 그게 아마.. 1000년 전쯤이던가요.”
“그렇다면 예언이 된 후 군요. 그렇다면 미래에 혼란이 오는 것과는..”
“시제님이 미래를 감지하셨으니 그 예언이 한 번 더 적용될 거라는 거죠, 미래에도.”
“예전에 있었던 대혼란에도 빈테리안이 큰 역할을 했었다고 봤습니다. 그게 결계를 만들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때 두 명의 빈테리안 네온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에어드를 지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제님은.. 아시죠?”
“시제님..?”
7월 5일, 7월 5일.
그 때 그 아이의 모습과 혁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보였다. 아니, 사실 겹쳐보이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둘이 너무 비슷했기 때문에, 똑같았기 때문에.
시제는 또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
[V2507년]
“아직도 안 돼.. 어떡하지.”
“내 마음대로 안되는 느낌이야. 뭐가 막고있는 것처럼.”
“한 번만 더 해보자.”
페어를 맞추기 위해 켄과 빈은 계속해서 노력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할 둘의 힘이 마치 물과 기름마냥 합쳐지지 않고 계속 빗나갔다.
“너무 힘들다. 오늘은 그만하자, 형 안색이 너무 안좋은데?”
켄은 매우 조급했다. 이걸 못하면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없잖아!
매일 저렇게 힘을 쓰니 켄의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건 빈도 마찬가지 였으나, 켄은 빈보다 훨씬 더 필사적으로 힘을 썼기에 정도가 더 심했다. 그래서 눈에 띄게 살이 빠졌고, 어느 날은 코피가 심하게 나기도 했다.
“형, 형 너무 말랐어. 조금 쉬면서 해도 되잖아.”
“니가 뭘 알아!”
잔뜩 예민해져있던 켄이 빈의 말에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아, 이게 아닌데.
빈이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켄이 조금 진정될 때까지 빈은 잠시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형이 어떤 마음인지 내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가 지켜야 할 게 형이었다면 나도 형처럼 필사적 이었을거야. 그렇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말야, 형이 나 때문에 그렇게 살도 빠지고 코피도 나고 하면, 난 그게 더 마음아플 것 같아. 그건 누구나 같은 마음일거고.”
“…….”
켄이 다 터진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화내서 미안해. 그냥, 그냥..”
켄이 말끝을 흐리며 울먹이자 빈은 그냥 안아주었다.
“될거야, 할 수 있어.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건강하게 혁이 봐야하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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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8년 6월]
결계는 여전히 불안정 했고, 제피스들의 낌새는 더욱 이상해졌다.
“어떡하죠, 시제님. 저렇게 큰 속성을 가진 애들이 엄청나게 힘을 썼는데도 여전히 맞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이대로라면 아이들만 지쳐갑니다. 뭐라도 해야해요.”
“무언가 방법이..”
페어리들이 저마다 결계에 대해 한 마디씩 말했다.
시제가 뭔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듯이, 얼른 말해보라는 듯이, 그들이 던진 말들이 시제의 옷자락을 툭툭 건드렸다.
사실은 뭐가 해답인지 희미하게 알고 있었다.
시제는 다시 예언을 생각했다.
불이 있는 곳에 빛이 있다. 불이 모여야 빛도 퍼진다. 불과 빛이 서로 힘을 내야 한다…….
시제는 켄의 부모를 다시 만나기로 결심했다.
다시 망토를 뒤집어 쓴 시제는 케니온으로 향했다.
불을 배우러 간 건지 혁은 집에 없었고 켄의 부모 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엇, 시제님?”
갑자기 찾아온 시제에 적잖이 놀란 둘은 혹시나 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이 되었다. 식은 땀을 겨우 진정시키고 켄의 아빠가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켄에게 무슨 일이라도..?”
다급한 시제는 켄의 부모가 묻는 켄의 안부를 듣지 못한 채 질문을 했다.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혁에게 어떤 특이한 점이라던지 켄과 함께 있을 때 변화..같은 게 있었나요?”
뭔가 일이 있구나, 예상한 켄의 부모는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바들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기억을 되감았다.
“아, 마침. 혁이가 네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불도 잘 다루지 못해요. 그런데 그렇다기엔 케니온 안에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고..”
“음, 또.. 참, 어렸을 때 켄 불꽃이 혁이랑 있을 때 유독 크게 튀었어요.”
“불꽃이요?”
켄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건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눈에서 불꽃이 튀는데.. 그게 혁이랑 같이 있으면 더 심했어요. 저는 그게 네온이라 그런 줄 알고..”
불꽃이 튀는 네온?
“어.. 아참 이것도 도움이 될까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둘이 같이 있으면 메디카가 커진다고 켄이 혁이랑만 놀았었어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엇, 시제님. 켄은 괜찮은건지...”
켄의 부모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시제는 빠르게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하..”
혁이 네온이 아닌 건 확실하다. 불도 아직까지 잘 다루지 못하는 걸 보면 이콘도 아니다. 페어리일리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불꽃. 켄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건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혁과 같이 있을 때만 불꽃이 튄다니 무슨 소리지?
역시.. 그 날의 그 아이처럼 특별한 존재인 건가. 그 때 내 요력을 잡아준 것처럼 힘을 섞이게 해 준다거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둘에게는 혁이 필요했다.
하지만, 하지만..
#
[V2508년 9월]
켄과 빈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노력해봐도 계속 힘만 빠져나갈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맞춰지지 않는 힘에 답답하기만 했다.
“형, 얼굴이 왜이렇게 빨개, 헉. 형 열나! 기다려봐 내가 메디카 좀 가져올게.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
빈이 질색이 된 얼굴로 신전 안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컥, 콜록콜록.”
지칠대로 지친 켄이 책상에 엎드러져 죽을 듯이 기침을 쏟아냈다.
“켄, 괜찮아? 너 열나. 물 갖다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네스터의 엔이 켄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몸이 엄청 뜨겁네……
“괜찮아, 콜록, 내가, 가면 돼.”
책상에서 일어나던 켄이 어지러움에 비틀거리자 엔이 켄을 받아냈다. 마른 몸이 여실히 느껴졌다. 뭐 때문에 켄이 이렇게 까지 하는지 엔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
[BGM-VOODOO(Intro)]
[V2508년 11월, 신전 중심부]
“그 예언의 불과 빛이 케니오니안과 빈테리안이라면 켄과 빈에게 해답이 있는 걸까요.”
“둘의 속성의 힘이 확실히 매우 강해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요?”
그 때 하늘색 머리의 한 페어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1000년전 그 날에 에어드를 구했던 게 3명의 네온들 뿐이 아니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시제님, 아십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역사서에도 적지 않은 내용이다.
몸이 떨렸다.
“그게, 네, 있었습니다.”
다른 페어리들이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하늘색 머리의 그 페어리가 다시 되물었다.
“혹시 그 존재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기억나십니까?”
안다.
확실히, 명확히, 너무 투명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게, 그러니까, 그 아이가, 빛 안에서, 3달 만에, 그 안에서, 7월 5일에, 그래서, 라벤더가.”
시제가 두서없이 읊조렸다.
시제 ‘운’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탁월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도 항상 에어드 먼저, 이성을 유지하면서 결정했다. 그래서 이렇게 흐트러진 시제의 모습은 페어리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장면이었다.
시제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대체 그 날에 무슨일이 있었기에 시제님이..”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시제님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요.”
너는, 왜, 아직까지.
곧 잊혀지겠지 했던 그 날의 잔상은 유독 오래가서 아직까지 시제를 괴롭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조각을 꺼내주어서 그런건지, 이상했다. 잊으려고 할수록 시제의 머릿속에 빨갛게 울그러져 그려지고 박혔다. 그게 대체 뭐라고.
지워내려 노력해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이렇게 떠오르는 장면에 그렇다, 원래 그런거다하고 순응하며 지내야 하는지 이제는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귀에서 아이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귀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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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09년]
또 몇 달이 흘렀다. 제피스들은 조용해지다 못해 아예 어둠속으로 숨어버렸다.
“제피스들이 아예 어둠 안으로 사라졌어요. 정말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둘의 상태가.. 특히 켄이 많이 안좋아요. 우선 아이들의 건강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요. 어제도 또 코피를 흘렸어요. 켄이 유독 필사적인 것도 있지만..”
“케니오니안 네온이 한 명 더 있으면 좋을텐데.”
야속하게도 켄 후로는 케니오니안에서 네온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 때 한 페어리가 갑자기 날개를 파르르 흔들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켄을 데려올 때 다른 아이가 있지 않았나요?”
그 말을 들은 시제가 빠르게 말을 받아쳤다.
“그 때 그 메디카는 켄 때문에 자란거지 그 아이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아니에요. 그 아이는, 네온도 아니고.. 아무튼 아닙니다. 켄이 거기 있었다고 해서 그 아이까지 끌어들이지 마세요.”
아니다, 아니다.
시제는 온갖 핑계를 대며 열심히 부정 중이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 때 그 기억에 또 다시 머리끝이 곤두섰다. 이럴 때마다 또 나타난다.
아니다, 일단 혁이는 네온이 아니잖아?
네온이 아닌데 여기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저건 우연이다. 아니다. 그럴리 없다. 아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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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510년, 신전 뜰]
밤하늘이 예뻤다. 빈테리안에 의해서 조절되는 낮밤이었는데, 오늘은 밤인가보다.
“빈아.”
“응, 형. 별이 예쁘지.”
“…….”
“…….”
같은 입장으로서 서로 잘 이해했기에 말이 없어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형 저기 입술 위에 점.. 있었는데 입술이 다 망가져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네.
다 터져버린 켄의 입술을 본 빈은 조용히 약을 건네며 말했다.
“힘들지.”
“좀, 많이. 힘들다.”
“…….”
“왜 안되는지, 뭐 때문인지. 진짜 포기하고 싶어져, 운명이 뭐라고.”
“…….”
“되지도 않는 걸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그래도 지켜야 할 존재들이 있어서 참아야 한다는 것도, 그게 참아진다는 것도 모두 다.”
“…….”
“근데 그러려고, 그러려고 온 거거든. 내가. 그래, 그러려고 왔지, 난.”
“…형.”
“빈아, 내가 다음 밤하늘을 또 볼 수 있을까? 혁이랑 같이? 아니 그 전에 혁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어, 아니, 그래야지 형. 왜 형 답지 않게 그런 소리를 하냐. 빨리 그럴 거라고 약속해.”
켄이 배시시 웃었다.
“큭큭, 그치? 하아, 또 이상한 소리 했네. 오케! 약속.”
“형이 혁이 만나는 날 내가 온 힘을 다해 밤을 만들어 줄게. 내가 또 그정도는 해 줄수 있지.우리 셋이 다 같이 별보자.”
“그래! 좋아.”
켄은 노란빛의 희망을 품었다. 그 빛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불안이 얽혀든 그런빛이었다.
말없이 별을 쳐다보던 빈이 물었다.
“형은 혁이 만나면, 하고 싶은 말 있어?”
“…글쎄.”
투명한 감정을 가득 담아 밤별에 달아보낸 켄은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때, 빈이가 그 질문을 했을 그 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걸. 그래 볼 걸 그랬다.
#
[BGM-FANTASY(inst.)]
[V2511년]
쉬이익-
쉬익-
쿠구궁-
갑자기 무언가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에 시제가 숨을 멈췄다.
“컥..”
시제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에어드의 상태를 바라봤다.
대체, 저게.
에어드의 경계 밖 어둠이 잠식한 곳, 그 곳의 제일 깊은 쪽.
그 곳에서는 몇 백 아니 몇 천 마리의 제피스들이 어둠을 몰고 무섭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꾸드득-
꾸득-
“안 돼, 안 돼.”
아직 결계가 안정되지 않았는데..!
물처럼 쏟아져 나온 제피스들은 저마다 괴기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에어드를 둘러쌌다. 몸에는 덕지덕지 어둠이 들러붙어 있었다. 에어드를 감싸는 동안 그들은 껌뻑거리며 계속해서 모양을 바꾸고 커졌다.
동시에 하늘은 검붉게 변해갔고 어둠은 천천히 에어드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페어리들, 이콘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검붉게 변해가는 하늘을 보고 크게 불안해했다.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고, 넋을 잃고. 한 번도 본적 없는 광경에 시제조차도 놀랐다. 저기 멀리서 무섭게 달려드는 제피스들의 모습은 상당히 혐오스러웠다. 그 날과 비슷할 거라 예상했지만 전혀 달랐다. 더 심하고, 더 강하고, 더 압도적이었다. 그날보다 더 짙은 어둠이 에어드를 감쌌다. 페어리들이 아직 흡수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까지 이렇게 영향을 주다니.
제피스들은 모든 에어드의 결계를 조여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케니온과 빈테로 경계에서 더 빠르고 크게 자라났다.
“이게, 이게 뭐야…”
쿵-
쿵-
조금씩 커진 제피스들이 결계 주변에 도달했고, 곧 결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직 맞물리지 않은 빛-불의 결계 위를 덮고 있는 물-풀의 결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금이 가고 있었다.
“흐악, 윽.”
“컥, 커억, 허억.”
제피스들이 커진 몸으로 결계를 부수려 칠 때마다 땅이 흔들리며 크게 비명을 질렀다. 신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결계를 놓는 구슬 주변에 앉아 결계를 지키던 네스터와 라베니카 네온들도 결계에 힘이 가해질 때마다 거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엔형!!”
“좀 만 버텨봐! 정신차려!!”
“잠깐, 잠깐만, 컥.”
나이가 기껏해야 열 몇뿐이 안되는 네스터, 라베니카의 네온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버텼다. 5명의 네온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몸이 최대한 흔들리지않게 서로를 지탱했다. 덕분에 조금은 상황이 나아보였다.
네온들의 상황은 저 쪽 빛-불의 결계도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수가 둘 밖에 안되는 그들은 상태가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켄과 빈은 손을 잡을 수 없어 둘이 마주 보고 구슬 앞에 앉아있었다. 일반적인 네온들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진 이 둘이 만든 결계는 여전히 맞물리지 않아 안정상태가 아니었고,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결계를 끼워맞추고 얼기설기 엉켜있는 것을 유지하려 하다 보니 체력이 또다시 배는 소모되었다.
쿵-
제피스들이 결계를 칠 때마다 네온들이 계속해서 크게 비틀거렸다.
“아..”
시제는 멍하게 아수라장이 된 이곳을 쳐다봤다.
이 혼란은 얼마나 지속 될까. 그 때처럼 또 100년? 이들은 어찌 될까. 에어드는? 예언은?
“헉, 허억.”
“형! 나 봐봐, 나 봐!”
“나는, 나는, 컥, 괜찮아, 버텨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된다.”
자신에게 눈을 떼지 말라며 소리지르는 빈이 하나로 보였다 두 개로 보였다 했다. 계속해서 멎지 않았던 열과 코피에 머리가 띵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눈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켄은 지금 이를 악물고 집중하고 있었다. 눈은 충혈되고, 꽉 쥔 손은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살에 박혀 피가 흘렀다. 꽉 다문 입술도 부르터 피가 샜다. 몸과 머리카락은 평소엔 절대 흘리지 않던 땀으로 온통 젖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땀방울들이 날샌 턱선을 따라 입술의 피와 섞여 한 두방울씩 탁자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사람들 지키러 왔는데, 내가.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다 소용 없잖아, 안 돼.
꼭 다시, 혁이 보러, 혁이랑 별 보러 가야지.
#
얼마 지나지 않아 제피스들은 무자비하게 페어리들을 흡수해 갔고, 그 경계에서는 페어리들의 소멸로 초목이 자라났지만 라베니칸들이 어찌 해보기도 전에 제피스들에게 처참히 짓밟혔다.
지금 제일 다급한 건 케니온과 빈테로의 이콘들과 페어리들이었다. 케니온의 경계에 유난히 몰려있던 그들은 벌써 결계를 뚫고 케니온의 땅을 부숴갔다. 제피스들은 이제 페어리들 뿐 아니라 이콘들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어둠에 먹힌 이콘들은 페어리들과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헉.. 허억..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이러다 진짜 소멸하겠어.
요력은 속절없이 줄어갔고, 시제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제피스들은 요력을 어느정도 흡수했는지 서로 뭉쳐 한 거대한 덩어리로 멈추지 않고 커졌다.
파지직-
파짓-
쩌억-
커진 제피스들의 몸에 부딪혀 케니온의 경계를 이루는 땅 끝은 계속해서 갈라져 나갔다. 그러나 불과 빛은 계속 충돌해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카득, 카득-
켄과 빈은 계속 합을 맞춰보려 노력했지만 결계는 서로 부딪혀 자꾸 맞지않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체력은 빠져나가는데 계속 엇갈리고 빗나가기만 했다. 한 번 엇갈릴때마다 머리가 부서질 듯이 아파왔다.
답답함에 켄은 눈물만 주룩주룩 흘렀다. 닭똥 같은 눈물이 바지에 투둑 떨어져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렸다. 몸 안에서 억누르지 못한 감정들이 밖으로 뻗어나가려 아우성쳤다.
왜 안되는거야, 대체 왜!
저기 창 너머로 어렴풋이 케니온이 보였다. 부서지고, 깨지고, 파괴되어 가고 있는, 점점 어둠에 잠겨가고 있는, 그런 케니온이 보였다. 머리도 어지럽고 눈물도 계속 났고, 온통 깜깜해 어디가 내 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켄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헉, 허억. 형, 켄 형. 나, 컥, 나 봐봐. 나 봐, 정신 잃으면 안돼.”
눈물과 땀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켄을 보며 빈이 소리질렀다.
형, 괜찮아? 형, 버텨야 돼.
몸 속에서 자꾸만 무언가 울컥 올라올 것 같았다. 나 근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
아무나 괜찮으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가진거 다 드릴테니까요, 저는 다 필요 없으니까요.
“끅, 나, 다 필요 없으니까, 진짜, 다 가져가도, 끅, 좋으니까, 다 줄 테니까요, 제발, 한 번만. 컥, 나 이제 다시, 혁이 못봐도, 좋으니까요, 나,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제발요.”
몸은 온통 젖고, 여기저기 피도 묻고, 핏줄이 터져 멍이 든, 그런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켄이 힘들게 말을 조각조각 잘라냈다. 울음에 섞여 잘 내뱉어지지 않았으나, 아무튼 켄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저기에요, 저기에 혁이가 있단 말이야. 제발 있잖아, 거기는 안 돼,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
[BGM-Into the void]
쿵-
“이게 무슨소리야.”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두워졌지?”
집 안에서 밥을 먹고 있던 셋이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땅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쿵-
선반 위에 놓여져있던, 혁이 좋아해 꽂아놓은 보라색 라벤더 꽃병이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 쳤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생전 처음보는 광경이 그들을 반겼다.
저 멀리 에어드의 경계밖에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고 그 안에는 몇천마리의 제피스들이 꾸득대며 달려들었다. 모양은 계속해서 변했고 서로 합쳐져 커지기도 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결계앞에 도달했다. 결계 바로 앞에 있는 제피스들은 저마다 기괴한 소리들을 내며 페어리들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페어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빨려들어갔다. 그 둘이 내는 불협화음은 온 에어드를 가득 채웠다. 결계는 점점 깨져갔고, 네온들이 결계를 회복하는 속도보다 제피스들이 결계를 부수는 게 빨랐다. 검붉게 변해가는 하늘은 그 모습만으로도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에어드의 미래를 보여주며 비웃는 것 같았다.
케니온과 빈테로 경계 부근에 있는 켄의 집에서 본 빈테로의 상황은 케니온과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빈테리안들이 빛을 내보려 했으나 바람, 하니 태풍앞의 촛불마냥 곧 꺼져버렸다.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빛이 꺼졌다 살아났다 했다.
경계를 부수고 들어온 제피스의 몸에 닿은 풀과 나무, 꽃들은 곧 까맣게 말라죽었다. 페어리들이 소멸해 생긴 초목들 역시 모두 까맣게 변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켄 형.
그 순간 혁의 머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신전에서 결계막을 지키고 있을 켄이었다.
켄 형은? 형, 괜찮은거지?
마음같아서는 당장 형이 있을 신전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신전으로 가 봤자, 신전으로 갔다 해도,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고 제가 불을 엄청 잘 다뤄서 저 앞에서 울부짖는 제피스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는 왜, 나는 왜 이렇게 못나서. 왜 아무것도 못해!”
갑자기 알 수 없는 엄청난 자괴감이 혁을 덮쳤다. 형, 내가 못나서, 그래서, 미안해.
‘응! 나는 짱 쎄!’
자신이 네온이라는 걸 알고난 후, 있지도 않은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웃음짓던 켄의 모습이 눈앞에 어렴풋이 스쳤다.
아냐, 우리 형은, 완전 쎄니까, 분명히 잘 있을거야. 혁은 그렇게 자위했다.
깨진 결계 사이에서 점점 커진 제피스는 이제는 케니온의 경계를 깎아나갔다. 이대로라면 우리 집이…!
집 안에서 물건들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났다.
부모님은 이미 넋이 나가 주저앉아 있었다. 혁이라도 무언가를 해야 했다.
집으로 들어간 혁은 이것 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챙긴 것은 켄의 노트, 그리고 다음으로 먹을 것 조금, 옷 조금.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라벤더 꽃. 나중에 켄을 다시 만날 때 주려고 잘 키워놓은 꽃이다. 형은 노란색, 나는 보라색.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썼었지, 참.
문 앞에서 켄의 그림과 예전에 같이 썼던 서약서가 가방을 짊어지고 나오던 혁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작은 크기의 노란색, 보라색 인장이 찍혀있었다. 혁은 잠시 멈칫하며 멍을 때렸다.
#
신전에서 네스터와 라베니카의 네온들은 이젠 거의 본능적으로 결계를 치고 있었다. 뭘 어떻게 조절해야하고, 어디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생각하며 결계를 만들 정신이 없었다. 페어리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어 이제는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경계에는 까맣게 죽은 초목들이 가득했고, 온갖 검은 것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에어드의 숨을 조였다.
제피스들이 결계를 치고 부수고 끼여 들어올 때마다 그 어린 네온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 그리고 그것은 시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정말 소멸한다. 에어드도, 저들도, 그리고 나도.
이제는, 이제는.
하지만.
귀에서 다시 그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눈에서 마지막 그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너는 왜 자꾸, 또 다시 이렇게 나타나는 거야.
쿵-
“형, 허억, 형!”
불 속성의 경계가 희미해 졌다는 게 느껴지더니 곧 큰 소리가 났다.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보니 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얼마나 죽기 직전까지 힘을 쓴 건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에어드를 위해, 아니 그 전부터 동생과 가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켄은 쓰러진 모습마저 필사적이었다. 그 정도 힘을 몇 달, 몇 년 동안이나 쉬지않고 결계를 만들기 위해 내보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입술도 다 트고, 몸 여기저기는 핏줄이 다 터졌고 열이 올라 볼이 발갛게 익었다. 머리와 옷은 땀 범벅에, 꽉 쥔 손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얼굴엔 눈물자국이 가득했고, 눈 밑은 얼마나 비벼댄건지 이미 헐어있었다. 그 날 그 아이와 이번엔 혁이 아닌 켄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켄, 켄!”
내 욕심이었을까.
동시에 어쩐 일인지 빈이 이루고 있던 결계마저 크게 흔들렸다. 곧 깨질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은 안 돼.
시제는 눈을 감고 부들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케니온.. 그 집의 그 아이가 7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
“?! 7월 5일 이라면…! 시제님, 그걸…!”
“그런데 케니온의 그 집쪽은 이미..”
저기 어딘가에서 페어리들의 소리가 웅웅 울렸다.
나 쓰러졌나봐.
아, 쓰러지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얼른 눈, 떠야하는데, 자꾸 잠이 와. 너무 졸리다. 어쩌지.

#
혁은 그 종이들을 바라보며 잠시 멍을 때렸다. 곧 무언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놀라 밖을 보니 이미 집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 된 후였다. 에어드 경계에 가까이 있던 집이라 더 빠르게 제피스들이 도달했다.
혼이 돌아온 혁이 서약서를 급하게 떼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혁과 부모의 머리위로 갑자기 큰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곧 쿵- 소리를 내며 그들을 삼켰다.
“안 돼!!”
그 비명을 외친 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곳은 익숙했으나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위치는 집 뒤인 것 같은데.
이런 빛 안인지 불 안인지 모를 공간은 대체 뭐지.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되게 어두웠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걸 혹시…내가 만든거…?
후두둑-
쿵-
쩌억-
들려오는 아우성과 괴성에 다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맞다, 지금..
“엄마? 아빠?”
#
[BGM-차가운 밤에]
윽, 눈, 떠야해, 떠야, 해.
엄청난 정신력으로 눈을 뜬 켄은 연신 반지를 만졌다.
“형!”
빈이 자신의 팔목을 잡는 느낌이 났다. 손에서 여릿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켄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긁어 시제에게 말했다. 목에서 피 맛이 났다.
“저, 저, 집으로, 가게, 해주세요. 결계, 콜록, 못 만들거라면, 차라리, 컥, 직접, 가서, 헉.”
켄을 볼 때마다 시제는 또 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또.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
직접 케니온으로 가겠다는 켄의 말을 들은 빈은 즉시 대답했다.
“허억, 그럼, 나도 가. 형이 가면 나도, 가.”
“저, 소멸해도, 괜찮으니까요, 허억, 괜찮으니까요..”
저 가야해요, 절 보내주세요. 구해야 해. 희생, 그런 거 하려고 왔으니까요, 전.
“…….”
혁이를 내가 좀 더 일찍 불렀더라면, 괜찮았을까.
내가 좀 더, 이성적이었다면.
시제는 켄과 빈을 경계로 보내줬다. 너희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게 에어드를 도울 수 있다면.
희망없는 희망, 시제는 그것을 바랐다.
이제와서?
그 아이가 또다시 머리를 울리며 비웃었다.
좀 더 빨리 나를 만나게 해줬어야지.
…….
#
비틀거리며 반쯤 빈에게 기대있던 켄은 이미 다 부서져 절벽 끝에 반쯤 매달려 위태롭게 걸쳐져 있는 집을 보고 눈이 시큰했다. 살짝 분 소슬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숨찼다. 펄럭거리는 옷자락이 몸을 아프게 때렸다.
곧 집이 절벽아래로 추락했다. 집이 없어졌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꾸득대며 에어드를 갉아먹는 제피스들 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삼켰다. 모든 것을 가져가 다시 시작할 거라는 듯이 그렇게.
이제는 색깔을 잃어버린 하늘을 바라보며 자책했다.
엄마, 아빠, 혁이 구하려고 갔던건데.
소중한 걸 구하려면 희생해야 한다면서요, 그러면 살릴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서,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근데 이게 뭐야?
눈엔 이젠 나오지도 않을 것 같았던 눈물과 함께 배신감이 고였다. 볼을 타고, 다 터진 입술을 타고, 그리고 땅에 툭. 배신감이 떨어졌다.
이제 난 어떡하지?
#
빈은 켄을 부축하며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형, 형이 힘들어 하는 건 나도 싫은데 말이지.
켄이 갑자기 이를 깨물며 눈물을 짜내자, 덩달아 빈도 눈물이 고였다. 나는 왜 울지? 켄에 대한 동정? 아냐, 이건 동정, 연민이 아닌, 배신감. 그래, 이건 배신감이다.
둘은 정말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불태웠다.
켄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두 네온의 힘은 곧 주변을 강하게 밝혔고, 잠시 제피스들이 주춤했다.
#
여기서 난 이제 뭘 더 어떡해야.
알 수 없는 공간 안에서 혁은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천천히 되짚었다.
그러니까, 음. 우리 집은 지금쯤 사라졌겠지. 그리고 제피스가 우릴 덮쳤는데 갑자기 내가 이걸 만들어서 살았고. 내 몸, 다 멀쩡하고.
그 순간 혁의 몸에 갑자기 열이 올랐다.
뭐지?
“몸이 뜨거워.”
팟-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꾸익- 하는 소리가 났다. 제피스의 것 같았다.
곧,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아주 깊이 배신감을 담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금은 익숙한.
꼭 켄의 목소리다.
“…형?”
켄임을 확신하며 혁은 라벤더 한 송이를 급히 챙겨 뒤도 보지 않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달렸다.
저기,
이미 사라져버린 집 쪽의 절벽 바로 앞.
한 쪽은 불이, 한쪽은 빛이 주변의 어둠을 강하게 삼키고 있었다.
그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
키도 커졌고, 얼굴도 조금은 어른스러워 졌으나 틀림없는 우리 형이다.
풀에 베이고 나무에 긁히며 달려갔다.
분명 어렸을 때와 똑 같은 상처였지만, 그 깊이는 꽤나 달랐다.
눈물이 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환희 쪽에 가까웠다.
“형!! 켄 형!! 형!!”
우리 형이다. 날 알아볼까? 나 많이컸지?
혁은 그렇게 켄을 부르며 달려가다 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켄과 눈이 마주쳤다.
쿵.
켄을 본 혁의 숨이 턱, 막혔다.
…형…
쓰러졌는지 어쨌는지 이마엔 멍이 들었고 입술은 다 부르텄다.
몸 여기저기는 핏줄이 터지고 얼굴은 달아올랐다.
눈에 띄게 말랐고, 눈도 잔뜩 부어서는 제대로 못 뜨고.
오랜만에 봤는데 이런 모습이면 어떡해.
손은 또 왜 그래 형.
왜 그렇게 피가 났어.
왜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
혁과 눈이 마주친 켄의 몸에서 일순간 불꽃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했다.
덩달아 빈의 몸에서도 빛이 사그라들었다.
쉬익-
꾸득, 꾸드득-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제피스 세 마리가 때를 타 켄의 몸으로 어둠을 뻗으려고 했다.
“형!!”
깜짝놀란 혁이 빈과 동시에 빠르게 달려가 켄을 안았다.
혁의 몸에 닿자 바로 공중에서 켄과 빈의 속성이 합쳐져 불꽃을 만들어 냈고, 땅을 강하게 때렸다.
몇 년간 그토록 염원하던 순간이었다.
파앗-
장관이었다.
불꽃이 솟구치는 곳에서 몇백 아니 몇천 줄기의 빛줄기가 뻗어져 나와 온 에어드와 경계너머를 환하게 밝혔다.
불꽃에 의해 제피스들의 몸은 하나 둘 잘리고 녹아갔다.
그 광경을 혁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순간 툭,
혁에게 쓰러지듯 안겨 있던 켄의 손과 고개가 바닥으로 숙여졌다.
…형?
너무 늦어버렸다.
켄의 몸은 이미 완전하지 못한 상태였고, 언제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직 정신력 하나로만 버티며 있던 켄이었다.
끝을 달리고 있던 그가 힘들었던 경주의 마무리 줄을 끊었다.
힘없이 늘어진 켄의 몸이 바닥의 닿자 혁의 주변에 노란 아도니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형, 켄 형.
딱 열 밤, 아니 딱 열 해 만이었다.
주변은 온통 밝았고,
야속하게도 혁의 주변에 가득 핀 아도니스는 눈이 쓰리게 예뻤다.
너무 예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반짝-
수백송이의 아도니스 꽃 중 유난히 노란 꽃 위에 얹어진 반지,
얼마나 만졌는지 닳고 닳아버린 그 반지가 혁의 눈에 들어온 순간 혁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없이 낙하하고, 굴러떨어졌다.
진득하게 눌러 담아놨던 감정을 꽃 위에 아득하게 쏟아냈다. 하늘이 샛노랗게 불탔다.
몰랐었다.
이제야 알았다.
이토록 밝은 어둠을,
이토록 빛나는 어둠을.
AFTER DARK : LUMINOUS
END.
외전
[BGM-today]
1.
“윽, 커헉.”
계속해서 줄어드는 요력에 시제는 비틀거렸다.
두 아이들을 그렇게 보낸 후, 귀에서는 자꾸 그 아이가 비웃는 소리가 맴돌았다.
“대체! 왜 아직까지!”
밖은 여전히 검었고, 제피스들이 꾸득댔다.
케니온과 빈테로의 결계에서 두 아이들이 빛과 불을 뿜는 게 보였다.
강한 타격을 받은 제피스들이 주춤했다.
저기, 저 빨간 건 뭐지?
이미 절벽이 되어버린 켄의 집 바로 뒤, 낮은 언덕에 빨간 무언가가 환히 빛나고 있었다.
곧, 거기에서 한 아이가 달려나왔다.
혁이?
귀에서는 여전히 아이가 계속 비명을 질렀다.
켄의 몸에서 갑자기 불이 사라지더니, 켄의 몸에 혁이 닿자 곧바로 켄과 빈 둘의 속성이 합쳐졌다. 빠른 속도로 어지러움이 해소됐다.
내가 뭐라고 저 아이를 저렇게 힘들게 했을까. 이리도 쉬운 것을.
얼마 뒤 검붉었던 하늘이 환해졌고 켄의 손이 땅에 닿자 주변에 아도니스가 만개했다.
그 순간,
천년이 넘도록 시제를 괴롭힌 그 소리도, 잔상도 모두 사라졌다.
설핏 기억만 날 뿐, 더 이상 괴롭게 하지 않았다.
코에서 라벤더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
3.
켄은 정말 마지막 힘을 짜내어 불을 내보냈다.
이걸 혁이 앞에서 보여줬으면 혁이가 박수를 쳐줬을텐데.
그 속에 있자니 조금은 차분해졌다. 배신감이 절념, 아니 절망으로 무게를 더해 저 밑으로 가라앉은 걸 차분하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웅웅- 귀가 울렸다. 누가 나를 부르나?
몸이 움직이질 않아 고개만 천천히 움직여 뒤를 봤다.
어, 저 얼굴 익숙한데.
훅-
순간 켄의 몸에서 불이 사라졌다.
우와, 혁이야?
오랜만에 봤는데 내가 좀.. 여기저기 엉망이지? 원래는 더 잘생겼는데, 헤헤.
달려가고 싶었지만, 가서 웃어주고 싶었지만, 잘 지냈냐고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머리도 움직이질 않아 어떤 글자부터 밖으로 꺼내놓아야 하는지 시작을 잡을 수 없었다. 저기 달려오다 멈춘 동생을 멍하니, 그냥 하릴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되는 게 없다, 참.
#
2.
혁은 한참을 울었다. 몸에 있는 모든 눈물을 끌어다 울었다.
형은 이제 나한테 대답 해줄 수가 없네. 뭐야, 열밤 지나면 온댔잖아 형. 내가 10년을 기다렸는데.
여기저기 밝게 뻗어나갔던 빛줄기를 원망하며 혁은 자신이 좋아하는 라벤더를 하나, 그 위에 얹어놓았다.
형 보면 내가 해줄 말이 되게 많았는데.
어렸을 때 쓴 일기장 다 봤다고 놀려주려고 했는데.
나 불 다루는 거 잘 못해서, 형은 분명히 잘 할 테니까, 가르쳐 달라고도 하고.
나는 이제 버섯 잘 먹는데, 형은 아직도 싫어하는지 물어도 보고.
그러려고 했는데, 형.
“집 나올 때, 끅, 좀 더 많이, 가지고 나올 걸, 흐끅, 남은게, 이거 밖에 없잖아, 형 노트, 흑, 이거 밖에, 없잖아.”
#
3.
신전으로 돌아간 빈은 켄의 짐을 들고 나왔다. 그렇게 자랑하던 곰돌이 가방, 피규어, 그림 노트. 그림노트의 뒷면은 혁은 빠진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사실은 시제님이 미웠다. 많이.
운명이 뭐라고, 그 예언이 뭐라고 그렇게 잡아놨는지.
자신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데 뭐, 괜찮지.
생각보다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조금 외로웠다. 왠지 버려진 느낌.
빈은 포도와 체리, 초콜릿을 입에 대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늘 그렇듯 신전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그것들을 뒤로하고 빈은 신전을 나와 케니온으로 향했다.
#
4.
켄의 죽음은 에어드에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늘 그렇듯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혁도, 빈도, 시제도 자신의 일을 하며, 그 날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냥 시간이 가면서 덧없이, 한없이, 속절없이 뻗어나가는, 수많은 날 중에 하나인 척하며 지나갔다.
#
마지막 외전
혁은 제 앞에 있는 아도니스를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울컥했지만, 그래도 이 꽃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거라도, 그래. 이거라도.
라비의 도움을 받아 꽃들을 새로 지은 자신의 집 뒤로 옮겼다.
집 안의 한 켠에는 켄의 물건들을 고이 담아놓았다.
빈이 가져다 준 짐까지 함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형! 오늘은 빈이 형이 형 물건들을 많이 갖다줬어. 그리고 밖에 나와서 형한테 물을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밤이 왔어. 반짝거리는 별도 엄청 많이 보인다. 너무 예쁘다. 형이랑 같이 봤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치.”
혁은 갑자기 찾아온 밤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혁의 꽃밭 바로 뒤에서 혁의 중얼거림을 들은 빈은 옅게,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 난 약속 지켰어. 형은 안 지켰는데, 나는 지켰어. 멍청한 켄 형.”
눈에서 괜히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미리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보조개를 집어넣으며 억지로 한 번 웃어봤다.
밤하늘은 정말 예뻤다. 별이 쏟아질 듯 아름다운, 그런 밤이었다.
밝고 빛나는, 그리고 어두운,
그런 밤이었다.
[BGM-안아줄게]
